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초명은 상래(相來)였으나, 종래(宗來)로 개명하였다. 자는 희보(喜甫)이다. 아버지는 박준원(朴駿源)이고,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 정지식(鄭志式)의 딸이다.
1770년(영조 4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1777년(정조 1)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1790년(정조 14)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등을 거쳐서 1794년 대사간에 재직 중 김종수(金鍾秀) 사건의 처리가 소홀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대사간으로 복직되었다. 1801년(순조 1) 이조참의를 거쳐, 황해도관찰사에 재임 중 부세(賦稅: 세금의 부과)의 개정에 노력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1803년 대사간 · 이조참의를 역임하면서 공적을 쌓아 가선대부로 가자되었고, 다음 해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06년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 형조 · 이조 · 공조 판서, 대사간 · 판윤 등 요직을 두루 거쳐, 다음 해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1809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공로가 있어 숭정대부에 가자되고,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11년 공조 · 병조 · 이조판서, 판윤 ·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판의금부사 · 형조판서 · 세자시강원좌부빈객(世子侍講院左副賓客) · 공조판서 · 원접사(遠接使)를 거쳐, 1813년 판돈녕부사 · 판윤 · 예조판서 ·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1816년 이조 · 예조 · 공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다음 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819년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다음 해 공조판서를 거쳐, 1821년 병조판서, 이듬해 세자시강원좌빈객(世子侍講院左賓客)이 되고, 1826년 판돈녕부사, 1830년 좌빈객을 거쳐, 1831년 판중추부사로 재직 중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