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성강은 황해도 고달산(高達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들어가는데, 이 일대는 산지 지형에 가까워 강의 흐름이 비교적 빠르며 바다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조수가 밀려드는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물이 깊어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고려 시대의 국도(國都)였던 개성과 가까이 위치하였던 관계로 벽란도는 고려 시대 제일의 하항이자 실질적인 유일의 국제 항구로서 발전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의 송나라 상인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하여 멀리 남양지방(南洋地方)과 서역지방(西域地方)의 해상들까지 자주 드나들며 교역을 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교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려의 관문적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국내에서 벽란도는 국도인 개성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나루터였다. 특히, 육로로 중국에서 오는 도로상에 있어 통행인도 많았던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 시대에는 주요 간선도로상에는 위치하지 않으나 개성에서 황해우도(黃海右道)로 통하는 대로상에 위치하였던 나루터로 교통의 요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곳이었다. 도승(渡丞)이 한 명 배치되어 나루터를 관할하게 하였으며 우도수참전운판관(右道水站轉運判官)이 겸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이었다가 다시 고구려의 관할로 되었으며,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잠시 동안 당나라의 소유였으나 신라가 당나라를 물리침에 따라 통일신라 관할이 되었다. 그 뒤 고려 시대에 들어와 국도가 개성으로 정하여지고 도로망이 정비됨에 따라 벽란도의 중요성은 증가되었다. 더욱이 국제항으로서 개항된 것은 벽란도의 중요성을 한층 높여준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개성부(開城府)에 속하였다가 뒤에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경기도 개성군 서면에 속하였다. 그러나 개성이 시로 승격되자 벽란도는 경기도 개풍군 서면에 속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가 38°선을 중심으로 남북이 분리되었을 당시에는 남한에 속하였으나 6·25 이후에 북한 지역에 속하게 되어 미수복 지구로 되어 있다.
고려 시대에 중요한 무역항이며 국제항이자 교통의 요지였던 벽란도의 기능은 조선시대에 들면서 점차 그 역할이 감소되었다. 더구나 철도교통을 비롯하여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다른 항구들이 개항을 하게 되자 그 역할은 더욱 축소되었으며 마침내는 그 역할을 거의 상실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벽란도 부근 언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관사(館舍)가 있어 중국 송나라의 사신 일행이 도착하였을 때와 떠나기 전에는 이곳에서 묵었다. 벽란도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예성항(禮成港)이었다가 이 벽란정에서 이름을 따 벽란도라고 바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