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일석(逸石). 아버지 정상(鼎相)과 어머니 진주강씨(晉州姜氏)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재동소학교(齋洞小學校)에 입학하였으며, 12살에 채씨(蔡氏)부인과 혼인하였다.
교동고등소학교(校洞高等小學校)를 거쳐 계산보통학교(桂山普通學校)로 전학, 15살에 과정을 마치고,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나가면서 이회영(李會榮)의 지도를 받았다.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해 가자 19살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가서, 1912년 만주 통화현(通化縣)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제1회로 졸업하였고, 1916년 북경 부근에 있는 협화대학(協和大學) 1년을 수료하였으며, 신흥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고국에 돌아와 1943년까지 24년 동안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서 영어교사로 봉직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의원 접흡단비서처(民主議院接洽團祕書處)에서 영어통역관으로 근무한 일이 있으며, 다시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9년에는 대통령특사로 정부승인을 교섭하기 위하여 필리핀에 다녀왔다. 1951년에는 국제연합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회의에 참석하였고,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제3대 외무부장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1952년부터 1953년까지는 국제연합수석대표, 1953년에 국무총리가 되어 외무부장관직을 겸임하였다.
1954년에는 제네바정치협상회의에 우리 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14개 항의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1956년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및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거치면서 후진양성에 힘을 썼고, 1963년에는 정민회(正民會)를 조직하여,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는 철저한 규칙생활로 건강관리를 하였고 공사생활이 청빈하였다. 변영만(卞榮晩)·변영로(卞榮魯)와 함께 이들 3형제는 일세의 기재(奇才)로서 옛 중국의 당송팔대가이던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3부자에 비겨 한국의 3변(三卞)이라 불리었다.
저서로는 ≪외교여록 外交餘錄≫·≪논어영역 論語英譯≫ 이외에 ≪My Attitude toward Ancestor Worship≫(1925)·≪Tales from Korea≫(1946)·≪Song from Korea≫(1948)·≪Korea My Country≫(194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