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 · )

장흥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정면
장흥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정면
건축
유적
문화재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2기의 석조 불탑. 석탑 · 석등. 국보.
정의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2기의 석조 불탑. 석탑 · 석등. 국보.
개설

현재 보림사 앞뜰의 원위치에 남북으로 대립하여 구조와 규모가 같은 2기의 삼층석탑이 서 있고 그 사이에 석등이 1기 남아 있다. 보림사는 헌안왕의 명으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체징(體澄 ; 804∼880)이 헌안왕 4년(860)에 창건한 사찰이다. 보조선사는 도의(道義)와 염거화상(廉居和尙)의 법맥을 이어 보림사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하였다.

1934년 가을 해체 복원할 때 초층탑신 상면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합(舍利盒)·자기류(磁器類)·목판(木版)·비단·사리·구슬 등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탑지(塔誌)가 발견되어, 탑의 조성연대 및 중건사실이 밝혀졌다. 탑지에 의하면, 이 탑은 870년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원탑(願塔)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891년(진성여왕5)에 사리 7매가 봉안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1478·1535·1684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내용 및 특징

석탑 2기중 남탑의 높이는 5.4m, 북탑의 높이는 5.9m이며, 석등의 높이 3.12m이다.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相輪)을 얹은 신라의 전형양식의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 장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된 지대석(地臺石)으로 놓였는데, 기단의 구성은 상·하층의 통식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의 갑석(甲石)이 얇고 부연(副椽: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얕아서 평판적인 느낌을 준다.

하층기단은 면석(面石)과 갑석을 같은 돌로써 조성하였는데 하단에는 높직한 굽을 돌린 위에 가느다란 1단의 받침을 조출하였으며,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받침기둥)를 모각(模刻)하였다. 하층기단의 갑상면에는 아무런 받침대도 없이 평평한 곳에 상층기단을 놓고 있는데, 상층기단 면석 각 면의 양쪽 우주는 정연하나 탱주는 하나로 간략화되는 수법을 보이고 있다.

상층기단 갑석 상면은 약간 경사를 보이며, 그 중앙에 원호(圓弧)와 각형(角形)의 2단 받침대를 마련하여 탑신부(塔身部)를 받고 있는데 이 2단의 받침대가 신라 성대의 석탑에서는 다각형이었던 것이 이때 와서는 1단이 원호로 되어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을 1석씩으로 조성하여 쌓았으며 각 층 탑신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한데, 2·3층 탑신석의 양쪽 우주는 초층에 비하여 가냘퍼졌음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옥개석은 각 층의 옥개받침이 5단씩이고 정상에는 각형 2단의 굄을 마련하여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는데 이 탑신 굄대도 낮아져서 약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 추녀도 기단부의 갑석과 같이 얇으며, 네 귀퉁이 전각(轉角)에는 반전(反轉)이 심하여 평박한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룬 것같이 보이고, 따라서 네 면의 합각(合閣)도 더욱 예리한 선으로서 심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양쪽 탑이 모두 완전하여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보주(寶珠)의 순으로 각 부의 부재를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양식수법이나 보륜은 남탑에는 삼륜(三輪), 북탑에는 오륜(五輪)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상륜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퍽 드문 예로서 귀한 자료로 주목된다.

그리고 양쪽 앞에는 각기 1좌의 배례석(拜禮石)이 놓였는데, 정면에 3구, 측면에 1구의 안상을 오목새김하여 신라시대 배례석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이 2기의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상층기단이 큰 데 비하여 하층기단은 협소하다. 탑신부에서 각 탑신의 폭에 비하여 우주의 폭도 가늘며 옥개석 낙수면도 매우 얇고 전각의 반전만이 크기 때문에 가냘픈 느낌을 준다. 또 노반이 크고 상륜도 굵은 편이나 전체의 조각장식은 매우 약화되었다.

석등은 전형적인 신라석등으로서, 지면에는 네모난 지복석(地覆石)과 지대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지대석 위에는 3단의 8각 하대석(下臺石) 받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8각이며 높은 받침과 복련석(覆蓮石)으로 구성되었는데, 받침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1좌씩 조각되었고 복련석에는 모퉁이를 향한 연판(蓮瓣)이 조각되었는데 꽃잎 끝은 말려서 작은 귀꽃이 되었다.

간주(竿柱)는 8각이지만 표면에 조각은 없고 비교적 짧은 편이다. 상대석(上臺石)은 밑에 3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꽃잎 속에 화형(花形)이 장식된 단판중엽(單瓣重葉)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다.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8각 1석으로 네 면에 화창(火窓)을 뚫었으며 화창 주위에는 얕은 턱을 파고 작은 구멍이 돌아가면서 뚫려 있다. 옥개석은 넓고 추녀 밑에는 경미한 반전이 있으며 위에는 귀꽃이 표현되었으며 정상 주위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상륜은 복잡하여 복련이 조각된 받침 위에 편구형(扁球形)의 보륜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을 축소한 보개가 얹혔는데, 안쪽에 중판연화(重瓣蓮華)가 조각되었음은 특이하다. 이 위에는 앙련이 받치고 있는 화염보주를 얹어 완형을 보이고 있다. 이 석등 역시 석탑과 더불어 870년(경문왕 10)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이 탑은 탑 속에서 발견된 탑지에 의하여 확실한 건탑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석탑과 석등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특히 삼층석탑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 있어 다른 탑을 복원할 때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탑파』(박경식, 예경, 2001)
『문화재대관』국보 1(한국문화재보호협회, 대학당, 1986)
『한국의 미 』15 석등·부도·비(정영호 감수, 중앙일보사, 1983)
집필자
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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