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각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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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산각서석
부여 부산각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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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있는 조선후기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쓰고, 이경여(李敬輿 , 1585~1657)의 손자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새긴 암각문. 필적. 시도유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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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있는 조선후기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쓰고, 이경여(李敬輿 , 1585~1657)의 손자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새긴 암각문. 필적. 시도유형문화재.
내용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에 위치한 서석(書石)으로, 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효종 때 명신인 이경여(李敬輿)가 1657년(효종 8)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에 관계된 정세의 득·실을 논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효종이 비답(批答)을 내렸다.

그 중에 “경의 뜻이 타당하고 마땅하지만 진실로 마음이 아프나 뜻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늦다(誠以至痛在心 有日暮途遠意).”라는 구절이 있었다.

후에 송시열(宋時烈)이 그 뜻을 기려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의 8자를 써서 아들 민서(敏敍)에게 전한 것을 이경여의 손자 이명이 1700년(숙종 26)에 이 암벽에 글씨 8자를 새기고 건물을 지었다.

이 정자의 이름을 대재각(大哉閣)이라 했는데, 이것은 이경여가 효종의 비답을 받았으므로 『상서(尙書)』의 “크도다 왕의 말씀이여(大哉王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글씨의 필체가 힘차고 강건하여 금석문의 자료로도 좋을 뿐 아니라, 당시 벼슬을 그만두고 초야에 내려와서도 북벌계획을 왕과 협의하고 토론하던 노재상의 굳은 정신이 담겨진 교훈적인 각서(刻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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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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