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가증리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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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청동기시대 석촉 · 석검 등이 출토된 돌널무덤. 석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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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청동기시대 석촉 · 석검 등이 출토된 돌널무덤. 석관묘.
내용

부근 주민들이 다리를 만들기 위해 석재를 채취하던 중 석축을 발견, 신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15년 9월에 일본학자 도리이(鳥居龍藏)가 조사하였다.

그의 조사일지에는 7기의 돌널무덤을 조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기록으로 남은 것은 5기뿐이다. 공식적인 보고가 없이 단순히 돌화살촉·돌검 등이 출토된 유적으로 소개되어 있고, 5기에 대해서는 우메하라[梅原末治] 자료에 사진과 도면이 남아 있다.

유적은 가증리 남쪽 높이 128m의 봉황산 북쪽 산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풍화암반을 파고 만들었다. 15m×20m의 구역 안에 4기는 각각 5∼10m 간격을 두고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1기는 그 옆으로 15m쯤 떨어져 자리한다. 장축은 모두 서북에서 동남향으로 두고 있다.

구조는 모두 같은 수법으로 2, 3개의 두꺼운 돌을 세워 긴 벽을 쌓고 양끝 짧은 벽은 1개의 판돌로 막아서 상자형으로 만들었다. 돌이 두꺼워 조합식(組合式) 돌널과는 다르다. 그중 3기의 바닥에는 판석이 깔려 있었고 뚜껑돌에 대한 기록은 없다.

크기는 155㎝×60㎝(제5호), 100㎝×42㎝(제2호), 124㎝×45㎝(제3호)인데 깊이는 모두 45㎝ 전후로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다.

출토유물로는 1단병식[有樋一段柄式] 돌검 3점, 자루에 홈과 절이 동시에 있는 2단병식[無樋二段柄式] 돌검 1점, 뿌리있는 돌화살촉[有莖石鏃] 38점 등이 있다. 돌화살촉·돌검이 놓인 방향은 모두 돌널의 장축방향과 일치한다. 돌화살촉은 끝을 단벽(短壁)쪽에, 돌검은 자루끝을 단벽 쪽에 붙이고 칼끝을 안으로 향하게 놓여 있었다.

의의와 평가

구조상으로 보아 원래부터 돌널무덤이었는지, 아니면 이 지역에 유행한 고인돌 구조에서 덮개돌이 없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청동기시대 분묘 유적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磨製石劍の硏究』(有光敎一, 京都大學文學部, 1959)
집필자
이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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