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는 북명(北溟)의 지명이 두 번 나온다. 신라의 남해왕 때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나라 왕의 인(印)을 얻어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과, 고구려 대무신왕 때 괴유(怪由)의 병이 위독하여 왕이 친히 가서 문병을 하니 “신은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 누차 후은(厚恩)을 입어 죽어도 산 것 같고 감히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괴유가 말한 기록이다.
왕은 그 말을 착하게 여기고 또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북명산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이 두 개의 기록으로 미루어 북명이 강릉을 명주(溟州)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은 의문이 간다.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기록에도 원산지방에 있었던 산산(蒜山)의 옛지명을 신라의 매시달(買尸達)로 표기한 점이나, 예나라 왕의 인이 나왔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원산지방이 타당하다고 본다.
명주의 북쪽에 있다는 의미의 북명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북명산은 현재 함경남도 원산이나 문천군 덕원면 지역에 있었던 산으로 추측된다. 북명과 관계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지명으로 해안지방에 진명포(鎭溟浦)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