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명나라 사신, 여진족 사신, 일본 사신이 머무는 숙소를 달리하였다. 여진족 사신이 서울에 왔을 때 묵는 숙소가 북평관이었다. 국초에는 여진족 사신을 위한 별도의 관사가 없어서 스님들의 숙소인 승사(僧舍) 등에 여진인들을 임시로 거처하게 하였고, 조선의 태종(太宗)은 여진족 사신을 위한 별도의 관사를 마련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여진인을 위한 국가 운영 숙소는 1438년(세종 20)에 정비되었다. 동부학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북평관으로 바꾸고 여진인 숙소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북평관에 관원을 두고, 인(印)을 주었다. 여진인이 방문하였을 때만 임시적으로 운영하는 건물이 아니라, 상설(常設) 아문으로 만들었으며, 아문의 등급은 5품이었다. 북평관에는 감호관(監護官, 3품 이하 6품관 이상) 3인과 녹사(錄事) 2인을 두었다. 북평관은 당시 동부 흥성방(興盛坊)에 있었고, 담장이 낮았으며, 담 밖에 인가(人家)가 없었다.
여진족 사신들은 북평관에서 숙식(宿食)하였고, 조선 조정에서 내려주는 잔치도 북평관에서 받았다. 여진 사신들은 기간을 정하여 조선 상인(商人)과 무역도 하였는데, 이 역시 북평관 마당에서 이루어졌다.
북평관은 여진족 사신을 위하여 만든 숙소였으므로 공간이 비어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다른 용도로 활용하기도 하였는데, 간혹 중국인이 배를 타다 풍랑을 만나 조선에 표류해 오면, 이들을 조사하고 중국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북평관에 머무르게 하기도 하였다.
선조 대 이후 북평관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임진왜란 시기 일본 사신의 숙소였던 동평관(東平館)이 불탔다는 것으로 보아, 북평관도 화재에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재건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북평관(北平館)을 동부(東部) 흥성방(興盛坊)에 두고 야인(野人)이 내조(來朝)하는 것을 접대하였는데, 어느 해에 허물어져 없어졌는지 알지 못하여 지금 상고할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북평관 터는 현재 서울 동대문 인근(종로 6가 20-2)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