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태호는 주로 왕실에서 태를 담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것으로, 내호(內壺)와 외호(外壺)로 이루어져 있다. 태호는 태지석(胎誌石)과 함께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안치되며 겉에 작은 태비(胎碑)가 세워지므로 도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태호는 고려대학교 경내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내호는 짚망태기에 넣어져 외호에 담겨져 있었으며 고운 흙이 3분의 2쯤 차 있었다고 한다.
이 태호의 문양은 항아리 어깨에서부터 만자문대(卍字文帶)와 중연판문양대(重蓮瓣文樣帶)를 상감으로 새겨넣고, 그 다음 인화기법(印花技法)으로 국화문양대(菊花文樣帶)를 두르고 있다. 몸체는 전면에 국화문을 가득 채우고, 위로는 흑백상감의 복사문(伏紗文) 안을 우점문(雨點文)으로 장식하였으며 밑에는 중연판문양대를 백상감하고 있다. 뚜껑의 문양은 꼭지를 중심으로 국화문양대, 파도문양대, 완자문양대가 차례로 구연부(口緣部)까지 배치되어 있다.
유약(釉藥)은 연한 청색을 띤 회백색의 분청유를 칠하였다. 1963년 광주광역시 동구 금곡동 묘지에서 이것과 비슷한 파편이 발굴, 조사된 바 있다. 15세기 중엽 인화문 분청사기의 가장 세련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