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서 울진군 천축산에 자리하고 있다. 불영사란 이름은 서쪽 산등성이에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가 절 앞 연못에 비치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대웅보전은 불영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현재의 건물은 1725년에 중건되었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불영사는 1379년에 작성된 「천축산불영사기(天竺山佛影寺記)」에 651년(신라 진덕여왕 5)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시 의상대사는 26세였고 당나라 유학 전이므로 창건 시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경내에 남아 있는 3층석탑과 대웅보전의 석축 등을 참고할 때 적어도 통일신라 또는 고려 초기에 이미 사찰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불영사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아 창건 이후 고려시대까지의 연혁을 알 수 없다. 1933년에 제작된 사적비(事蹟碑)에 따르면 1396년(태조 5)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재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578년(선조 11)에는 성원(性元)법사가 영산전과 서전(西殿)을 세우고 임진왜란 후에는 법당과 동서 선당을 세웠다고 한다. 불영사는 17세기에 지속적인 불사를 통해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20년(숙종 46)에 화재가 발생하여 영산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1725년(영조 1)에 중창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여러 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웅보전은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02년(선조 35)에 인섬장로(印暹長老)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1629년(인조 7)에 중수하였으나 1720년(숙종 46) 화재로 인해 또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725년(영조 1)에 중건한 것이다. 1750년(영조 26)과 1810년(순조 10)에 서까래를 보수한 이후 1905년(광무 9), 1993년 등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지만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영사는 대웅보전 영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응진전(보물, 1981년 지정), 명부전, 의상전, 칠성각, 극락전 등이 자리하고, 동쪽에는 선원과 무위당 등이 자리한다. 대웅보전이 자리한 중심 영역은 3층석탑이 세워진 마당을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3층석탑을 중심으로 북쪽에 대웅보전이 자리하고 남쪽에는 설법당, 동쪽에는 황화실, 서쪽에는 설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기단은 지형의 높낮이에 맞춰 조성하였는데 4면의 구성이 서로 다르다. 정면은 잘 다듬은 면석과 갑석을 사용하고 하부에 돌거북으로 장식하였으나 나머지 면은 장대석 또는 막돌을 사용하였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민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 구조이다. 주간포는 정면의 경우 매 칸마다 2조씩 배치하였으나 배면은 가운데 칸에만 2조를 놓고 좌우 협칸에는 1조를 놓았다. 측면은 모든 칸에 1조씩만 배치하였다. 첨차는 교두형(翹頭形)이다. 1·2·3제공은 끝 부분이 하늘로 향하는 앙서형(仰舌形)인데 초제공과 2제공은 연꽃을 조각한 반면에 3제공은 연봉오리를 조각하였다. 4제공은 익공형(翼工形)이고 5제공은 운공형(雲工形)인데 정면 가운데 칸은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귀공포에서는 귀한대를 1마리 용으로 조각하여 장식성을 높였다. 제공은 건물 내부에서 4단까지 장식이 없는 교두형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5제공은 주상포(柱上包, 기둥 위에 놓이는 포작)에서 용머리를 조각하였고 주간포에서는 삼분두(三分頭)로 처리하였다.
가구 구조(架構構造)는 1고주(高柱) 5량 형식이다. 고주는 예불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배면 중도리 위치에 맞춰 측면 기둥열에서 약간 뒤쪽으로 물려 세웠다. 대들보와 툇보는 공포 위에 놓이며 대들보와 툇보가 만나는 부분의 하부에는 고주를 세워 받쳤다. 대들보 위에는 조각이 화려한 포대공을 짜서 종보를 결구하였으며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다. 천장은 중도리를 기준으로 안쪽은 우물천장으로 구성하고 바깥쪽은 빗천장으로 처리하였는데 조각이 화려하다.
불영사 대웅보전은 공포의 짜임새가 특색 있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이지만 바깥쪽의 출목 간격을 안쪽보다 넓게 조정하여 출목의 높이를 같게 처리하였다. 그리고 제공은 바깥쪽에서 연꽃와 연봉오리, 용머리 등으로 화려하게 조각한 반면에 안쪽에서는 용머리만 조각하고 나머지는 교두형으로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불영사 대웅보전은 서까래의 구성 방법도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서까래는 중도리를 기준으로 위쪽에 짧은 서까래를 걸고 아래쪽에는 긴 서까래를 놓는다. 그러나 이 건물은 중도리와 종도리 사이에 짧은 서까래를 걸지 않고 아래쪽 긴 서까래 위에 중도리와 내목도리의 중간 지점에서 덧도리를 올리고 종도리부터 외목도리 밖까지 빠져나오는 긴 서까래를 걸었다. 이러한 구조는 적심과 보토량을 적게 하여 지붕 하중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뛰어난 장식성을 들 수 있다. 정면 기단의 거북이 장식, 귀한대를 용으로 조각한 것, 화려한 포대공, 반자틀의 조각 수법 등은 다른 건축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외부의 단청은 새로 칠한 것이지만 내부의 단청은 고색단청으로 18세기의 단청 수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불영사 대웅보전은 1725년에 중건된 건물로서 내출목이 외출목보다 많고, 제공의 장식이 화려해지는 등 조선 후기 다포계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붕부의 구조도 특색 있으며 부재의 조각솜씨도 뛰어나 건축사적인 가치가 높다. 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수준 높은 내부 탱화와 단청 등은 미술사 연구에 있어 소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