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려는 1797년(정조 21) 강이천(姜彛天)의 비어사건(飛語事件)에 연루되어 부령에 유배되고, 1801년(순조 1) 다시 신유사옥( 신유박해)으로 진해에 이배된 일이 있었다. ‘사유(思牖)’란 진해 적소(謫所) 오른쪽 문에 붙인 편액인데, ‘사(思)’는 부령의 사람들과 그곳 생활을 그리워하는 김려의 심경을 나타내고, ‘유(牖)’는 원래 가난한 집의 들창문을 가리키는 말로서 진해에서의 곤고한 생활처지를 나타낸다.
상권에 147수, 하권에 143수가 수록되어 모두 290수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으로 그의 문집 『담정유고(藫庭遺藁)』 권5·6에 실려 있다. 「간성춘예집(艮城春藝集)」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악부시집이다.
매 편의 첫 부분은 “문여하소사, 소사북해미(問汝何所思, 所思北海湄)”의 구절이 고정적으로 삽입되어 있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일정하게 칠언절구로 되어 있다. 매 편의 끝에는 시의 내용에 대해 간단한 해설을 덧붙여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사유악부』의 말미에 실려 있는 「자서( 自序)」에서 그는 이 작품이 도학적 · 형이상학적 생활과 사고를 담지 않고, 직접 보고 겪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우러나온 생각의 산물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내용이 비록 비리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읊었기 때문에 「오유(吳歈)」 · 「채구(蔡謳)」와 같은 중국 시가와는 구분되는 독자성을 가진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주체적 의식을 드러내 보였다.
『사유악부』의 시의 내용은 부령지방에서 일상적 생활 가운데 전개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살아 움직이는 듯한 군상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전반적으로 자신의 불우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삶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통받는 민중의 생활상과 변경지방 관료들의 부패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고발, 가족에 대한 그리움, 유배지에서 자신에게 학문을 전수 받던 제자들과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씨에 대한 칭송과 격려 등의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사유악부』에는 그밖에 북방개척에 공헌한 인물들에 대한 찬양과 부기(府妓) 연희(蓮姬) 등과 어울리며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한편, 연모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인 것들도 있다.
표현에 있어서도 “개 같은 김가에 고양이 같은 이가(金狗李猫)”와 같은 원색적인 표현이나, 애욕의 대담한 묘사, 토속적 언어나 풍물 등을 거리낌없이 자유분방한 필치로 표현해내고 있다.
이와 같이 시창작에 있어 자신의 일상적인 체험을 표현해내고 감정을 방만하게 노출시킨 것은 이전의 온유돈후의 형이상학적 시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유악부』가 조선 후기 시사(詩史)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의의 또한 이러한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