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부산여자대학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규모는 확인되지 못한 상태이며, 확인된 고분은 분포지역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166기에 이르고 있다.
1차 조사에서 발굴한 고분은 제3호분, 제21호분, 제50호분의 3기이며, 이 밖에 도굴에 의해 연도(羨道)가 개방되어 있던 제1호분의 연도 입구를 정리해 실측하였다.
제1호분의 내부구조는 연도가 남벽의 중앙에 달린 남북을 장축(長軸)으로 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다. 석실은 장벽(長壁) 366∼383㎝, 단벽(短壁) 187㎝, 높이 285㎝, 연도 길이 320㎝, 연도 너비 78∼119㎝, 연도 높이 198㎝이다.
남북벽(단벽)은 수직에 가깝게 쌓았으며, 동서벽(장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안으로 기울게 쌓아 4매의 큰 판석(板石)으로 천장을 얹었다. 석실의 바닥에는 납작한 판석들이 깔렸던 흔적이 있었다.
석실의 내부는 완전히 도굴되어 복원이 불가능한 토기편들이 출토되었을 뿐 이렇다 할 유물이 없었다. 그러나 연도의 입구를 정리하다가 고배(高杯) 1점, 파수부배(把手附杯) 1점, 금동제세환이식(金銅製細環耳飾) 1점이 발견되었다.
제3호분은 한 봉토 속에서 연도가 남쪽 단벽의 서쪽으로 치우친 남북장축의 횡혈식석실을 중앙에 두고 북쪽과 서쪽, 그리고 연도 앞에는 토광묘(土壙墓)가, 동쪽에는 석관묘(石棺墓)가 각각 1기씩 배장(陪葬)되어 있었다. 중앙의 석실은 장벽(동서벽) 380∼426㎝, 단벽(남북벽) 227㎝, 높이 195㎝, 연도 길이 230㎝, 연도 너비 62∼74㎝이다.
제3호분의 주실(主室)인 석실의 내부는 완전히 도굴당했으나, 주변의 토광과 석관은 도굴을 면했다. 북쪽 토광묘에서는 은장봉황병두대도(銀粧鳳凰柄頭大刀)·대호(大壺)·단경호(短頸壺) 및 기대(器臺), 장경호(長頸壺)·무개고배(無蓋高杯)·철부(鐵斧)·철모(鐵矛)·안교(鞍橋) 등이 출토되었다. 동쪽 석관묘에서는 장경호·유개고배(有蓋高杯)가, 서쪽 토광묘에서는 무개고배·유개고배·장경호·파수배(把手杯)·철부가, 남쪽 토광묘에서는 무개고배·회청색연질 단경호(灰靑色軟質短頸壺)·유대단경파수부호(有臺短頸把手附壺)·파수배가 출토되었다.
제21호분은 수혈식석곽분으로 주곽(主廓)의 크기는 동서 장벽 495㎝, 남북 단벽 67㎝, 깊이 72㎝로 할석을 쌓아 벽을 만든 후 10장의 장대석(長大石)으로 천장을 덮었다. 남북장축인 주곽의 동쪽 모퉁이로부터 동남쪽으로 1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판석으로 짠 길이 1m, 너비 50㎝ 미만의 파괴된 부곽이 발견되었다.
주곽은 완전히 도굴되었으나 부곽에서 단경호와 유개고배가 출토되었고, 봉토층에서 무개고배·장경호·소배(小杯) 등이 발견되었다.
제50호분도 수혈식석곽분으로 크기는 장벽 490㎝, 단벽 73㎝, 깊이 90∼100㎝이다. 주곽의 동쪽장벽에 거의 붙어서 할석으로 구성한 파괴된 부곽이 있었는데 크기는 길이 1m 미만이었다.
출토유물은 주곽은 여러 차례 도굴을 당해 잔류품(殘留品)으로 유리구슬 30여 점과 철부 및 복원이 어려운 토기조각들이 수습되었다. 부곽에서는 단경호만 4점이 출토되었다.
석실들은 대부분 도굴되었지만 부곽에서 출토된 유물의 성격으로 미뤄볼 때, 이 고분군은 대개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초반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