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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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개념
고려시대 개경의 지덕을 위하여 설정한 세 종류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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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시대 개경의 지덕을 위하여 설정한 세 종류의 지역.
내용

세 곳의 지덕을 빌어 국기(國基:국가의 기초)를 연장하려는 것으로, 지리도참사상과 산악숭배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났으며, 삼경제(三京制)와 비슷한 관념을 지니고 있다.

삼소는 좌소(左蘇)·우소(右蘇)·북소(北蘇)를 말하는데, ‘소(蘇)’의 의미에 대하여는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이병도(李丙燾)는 산이나 봉우리를 의미하는 ‘소리’·‘솔’·‘수리’·‘솟’, 또는 용출(湧出)·초출(超出)의 뜻인 ‘솟’·‘솟을’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숭고의 뜻과 연결되는 산악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삼소는 삼산(三山)이라고 단정하고 송악(松岳)을 중심으로 한 주위의 삼진산(三鎭山) 혹은 삼신산(三神山)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김상기(金庠基)는 소복(蘇復)·소생(蘇生)의 뜻으로 여기고 지기(地氣)를 소생시키기 위하여 고려 때 소복별감(蘇復別監)이 설치된 사실과 ≪고려사≫의 충렬왕세가(忠烈王世家)에 삼소(三蘇)가 삼소(三甦)로 표기된 것을 보고, 갱생의 뜻이 뚜렷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있으나 비보연기(裨補延基)의 관념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양자가 공통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삼소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 것은 1174년(명종 4) 5월 삼소조성도감을 두어 세 지역에 궁궐을 축조하였다는 것으로, 이 때 지정된 삼소는 좌소 백악산(白岳山), 우소 백마산(白馬山), 북소 기달산(箕達山)이었다. 공민왕 때는 평양·금강산·충주 세 곳을 삼소로 정하고 순주(巡駐)하려고 하였다.

1378년(우왕 4) 북소 기달산이 곧 협계(峽溪:험하고 좁은 계곡)이므로 천도하여야 한다는 말이 나돌았고, 북소의 조성을 위하여 도감을 새로이 만들기로 하다가 중지된 일도 있음을 미루어볼 때, 삼소의 대상지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고려 말까지도 삼소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가 다섯 차례에 걸쳐 서경에 가서 북진(北鎭:지금의 함경북도의 六鎭지방) 등을 돌아다닌 점이라든가, <훈요십조 訓要十條>에서 서경의 지력(地力)을 높게 평가한 점 등이 삼소와 연결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태조 때부터 풍수지리에 대한 인식이 매우 높았고, 국난과 같은 위기 때 특히 강하게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지리도참사상이 삼한시대의 소도제(蘇塗制), 삼국시대의 삼산제(三山制)와 같은 산악숭배의 유풍과 결합되어 삼소사상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삼경제와는 비보연기의 관념에서 공통되나, 삼경제에서는 개경을 중경(中京)으로 하여 서경과 남경을 포함시켜 삼경으로 다룬 데 비하여, 삼소제에서는 개경이나 송악을 제외한 3개소로 이루어져 있어 발상이 일치된다고는 할 수 없다.

본래 삼소제가 명종 때에 내려와서야 논의된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삼경제에 비해서는 덜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으며, 수도의 지형관을 배경으로 한 일종의 지세론(地勢論)이었는데, 묘청(妙淸)의 난 이래로 서경의 의미가 바뀌게 됨에 따라 비보연기의 관념이 덧붙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명종 때는 송악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북쪽의 세 개의 산이 삼소였던 반면, 공민왕 때는 평양과 충주 그리고 금강산으로 바뀌었고, 개경과 거리가 훨씬 멀어졌다. 이 단계에 이르자 삼소는 이미 산과 결부시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산악숭배사상에 따라 삼소가 다만 세 신산으로만 취급되지 않고, 풍수지리에 따른 길지(吉地)로 여겨져 궁궐이나 순주 혹은 천도의 목적지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한국의 도교사상』(차주환, 동화출판공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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