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채(三彩)는 납[鉛, Pb]을 주성분으로 하는 연유에 금속산화물을 첨가하여 700800℃의 저화도에서 번조한 연유도기를 말한다. 연유에 산화철(酸化鐵)을 넣으면 갈유와 황유로 변하고, 산화동(酸化銅)을 첨가하면 녹유가 되며, 산화코발트를 넣으면 남유가 된다. 즉 삼채는 그릇을 만들어 10001100℃에서 구워낸 다음, 금속산화물이 첨가된 3가지 이상의 연유를 동시에 그릇 표면에 시유한 뒤, 산화염(酸化焰)으로 번조한 것이다. 다만, 삼채는 시유된 유약의 현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채도기(三彩陶器)라고 표기하는 것이 올바르다.
‘삼채’라는 단어는 “저화도 시유도자에 색을 입힌 민무늬 삼채[素三彩]를 지칭한다.”는 청 강희(康熙, 16621722) 연간의 문헌 기록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민국(民國) 시기에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북망산(北邙山) 일대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북위(北魏, 386534) 및 수당(隋唐) 시대 무덤 중 당대(唐代, 618~907) 무덤에서 다양한 색이 입혀진 채색유 자기가 출토되어 당삼채(唐三彩)라 부르게 되었다.
중국의 연유도기는 동한대(東漢代)에 황유·녹유 도기를 중심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북위의 사마금룡묘(司馬金龍墓, 484년)에서 2가지 연유가 시유된 이채도기(二彩陶器)가 출토되었고, 수당시대에 접어들어 무덤에 넣을 부장품으로 삼채기법에 의한 도용(陶俑: 흙으로 만든 인형)이 다양하게 제작되면서 삼채도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서 황유나 녹유 등 단색의 연유도기가 7세기경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2가지 이상의 색상으로 발색되는 연유도기는 통일신라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발해에서도 화려한 삼채도기가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삼채도기는 엄밀히 말하면, 황유와 갈유 2가지 유약이 시유된 이채도기이며, 당삼채와 비교하면 발색이 좋지 못하다. 뚜껑이 있는 고배(高杯, 굽다리접시)나 골호(骨壺, 뼈 단지), 병 등이 제작되었으며, 기하학적인 인화문을 장식한 경우가 많다. 2000년대 후반 경상북도 경주시 화곡리 유적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삼채도기 가마터가 확인되어 경주를 중심으로 삼채도기가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통일신라시대의 삼채도기는 신라 삼채라 불렸다.
이 시기 발해에서도 용기를 비롯한 향로, 도용 등의 삼채도기가 생산되었는데, 통일신라 삼채도기보다 훨씬 뛰어난 품질을 보여 준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시[寧安市] 삼릉군 4호분에서 출토된 〈도기삼채수족세발향로(陶器三彩獸三足香爐)〉는 뚜껑이 있는 세발 달린 향로로, 화려한 다리 장식이나 뚜껑의 투각기법 등이 상당히 뛰어난 수작이다. 또한 황유·갈유·녹유 등의 조화가 당삼채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
통일신라시대의 삼채도기는 당삼채와 비교하여 품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지만, 당시 유입된 당삼채도기를 모방하면서도 통일신라시대의 대표 유물인 인화문 도기와 접목하여 통일신라만의 독특한 특색을 보여 준다. 또한 발해의 삼채도기는 당삼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수준급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삼채도기는 자연유가 아닌 별도의 유약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큰 범주에서 자기 생산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