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년(선조 36) 중국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처음 명칭은 제갈량의 도호(道號)를 따서 ‘와룡사(臥龍祠)’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평안도까지 파천했을 때 이 영유(永柔) 지방에서 한동안 머물렀는데, 그 때 꿈속에서 제갈량을 보았다고 한다. 그 뒤 왜란의 극복이 제갈량의 음덕에 힘입은 바 적지 않았다고 하여, 왕명으로 그의 공덕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여기에는 왜란 중에 명나라 장수들이 수호신으로서 관우(關羽)를 제향하던 관왕묘(關王廟)를 곳곳에 세웠던 사실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서원이 아닌 사우였기 때문에 유생이 출입하거나 돌보지 않아 퇴락된 상태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661년(현종 2) 홍문관부교리 이민서(李敏敍)의 실정 보고를 바탕으로 평안감사에게 중수하게 하고, 조정에서 ‘와룡사’라는 어필 현판과 비석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다른 서원ㆍ사우와는 달리 특별히 관전(官田, 德池筒)과 공노비 약간 명을 지급하였다.
그 뒤 1695년(숙종 21) 숙종이 『송사(宋史)』를 읽다가 충신 악비(岳飛)의 충절에 감동해 그를 여기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750년(영조 26) 송나라 말기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을 함께 배향하면서 ‘삼충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그 외에 숙종 대에는 명나라를 위해 순절한 조선의 조방장(助防將) 김응하(金應河)를 배향하려고 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삼충사는 국가에 대한 충절을 장려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녀 역대 왕들에 의해 건립, 보호되어 왔다. 때문에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ㆍ사우 철폐 때도 훼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