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릉 정려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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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서능 정려비
서능 정려비
조선시대사
유적
국가유산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에 있는 조선전기 에 건립된 고려 제23대 고종 당시 효자 서릉 관련 정려비.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장성 서능 정려비(長城 徐稜 旌閭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전라남도
종목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유산(1988년 03월 16일 지정)
소재지
전남 장성군 북일면 봉암로 1193 (박산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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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에 있는 조선전기 에 건립된 고려 제23대 고종 당시 효자 서릉 관련 정려비.
내용

1988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서릉은 이천(利川)인으로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로서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장성현조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북일면 작동마을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효심과 학문이 지극하고 뛰어나 문하시중을 지냈고, 「거가십훈(居家十訓)」을 지었다.

고향에서 어머니를 봉양할 때 목에 큰 종기가 생겨서 의원에 물으니 살아있는 개구리만이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다 하였다. 한 겨울에 구할 길이 없었으나 집앞 나무 아래에다 약탕관을 걸고 약을 끓이자 나무에서 청개구리가 떨어져 약탕관에 들어갔고, 이 약으로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조정에서는 이를 알고 정려를 내려 포상하였다. 시효는 절효(節孝)이다.

이 비는 1578년(선조 11)에 건립하였다. 화려한 연꽃무늬 대석 위에 비신을 세웠고, 그 위에 이수를 얹었다. 이수는 구름무늬와 함께 개구리형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비명은 ‘고려시중절효선생서공비명(高麗侍中節孝先生徐公碑銘)’이다. 비문은 박순(朴淳)이 짓고 백광훈(1537∼1582)이 글씨를 썼으며 음기(陰記: 비 뒷면의 기록)는 서태수(徐台壽)가 지었고, 전액은 조억수(趙億壽)가 썼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87㎝, 너비 19.5㎝이며 비각으로 둘러 있다.

변걸(邊杰) 등 12인이 주도하여 1669년(현종 10)부터 1694년(숙종 20) 사이에 비각을 중건하였다.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편액을 썼고, 1824년(순조 24)과 1913년에 중수하였다. 이 비는 고려시대 호남지방 효행의 상징이다.

참고문헌

『문화재도록-도지정문화재편-』(전라남도, 1998)
「서릉절효각정려비 조사보고서」(이해준, 『1987문화재조사보고서-추가-3』, 전라남도, 1987)
집필자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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