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3월 2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16년 1월 7일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현재 산청군 삼장면 내원사(內院寺)에 있다. 원래 이 비로자나불상은 지리산 자락에 속하는 산청 지역의 한 산봉우리쯤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위 절터에 있었다. 이 바위 절터는 앞에서 바라보면 남쪽과 서쪽이 거대한 절벽이지만 산 정상에서 내려온 능선의 끝단과 연접되어 있어 협소하지만 안정감을 준다. 이곳에 흩어져 있던 석조대좌와 광배 조각도 이 불상과 한 조를 이루는 것으로 확인되어 현재 내원사에 보관되어 있다.
불상은 대좌와 광배를 두루 갖춘 석불상(石佛像)으로, 광배만 완전 복원이 곤란할 뿐 전반적으로 복원이 가능한 편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로 앉아 있는 이 좌불상은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하지만 풍화로 인한 마멸 때문에 표면의 세부는 분명하지 않다.
머리의 육계(肉髻)는 높고 큼직한 편이나 약간 파손되었다. 머리칼은 크고 둥근 나발(螺髮)이며 머리 윤곽은 둥글고 완만한 편이다. 얼굴은 둥글고 부피감이 풍부하여 8세기 신라 불상의 원만상(圓滿像)을 잘 나타내었다. 단아한 눈, 단정한 코, 작고 예쁜 입, 팽창된 뺨의 부피감이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얼굴의 원만상은 8세기 불상 가운데에도 가장 우수한 편에 속하기 때문에 이 불상은 당대의 뛰어난 명장(名匠)의 손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상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자연스러운 가슴, 허리의 굴곡, 어깨나 팔의 부피감 등에서 사실미를 잘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약간 들어 가슴 부근에 대어 주먹을 쥐었다. 왼손은 무릎과 거의 수평이 되도록 내려 주먹을 쥐었는데, 검지를 곧게 세워 오른손 주먹 속으로 넣었다. 왼손의 집게손가락이 비현실적으로 길고, 두 손이 밑으로 내려진 점 등은 9세기 중엽의 대다수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 표현과는 달리 사실적이지 못한 것이다. 이는 지권인을 처음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하는 데서 오는 초기 단계의 어색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대의(大衣)는 양어깨를 감싼 통견 형식으로 입었는데 두께가 얇아 육체의 굴곡을 드러나게 하였다. 옷주름 역시 가는 돋을띠주름을 촘촘하고 유려하게 표현하여 8세기 불상 옷주름의 한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결가부좌한 하체의 너비는 비교적 넓은 편이나 높이는 낮아서 높은 대좌 위에 앉아야 시각상 안정감을 줄 수 있게 되어 있다.
대좌는 하대(下臺)·중대(中臺)·상대(上臺)로 이루어졌다. 하대는 8각에 복판(複瓣: 겹잎)의 연꽃무늬를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으로 새겼다. 중대는 8각의 각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상대는 복판연화문을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으로 두 겹[重葉] 새기고 있어 8세기 대좌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중대 중앙이 관통되어 구멍이 뚫려 있고, 상대 윗면의 뒤쪽이 테두리를 따라 둥글게 등받이처럼 만들어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광배를 고정시키기 위한 장치로 생각된다.
광배는 배모양 거신광배(擧身光背)로, 상부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하단까지 깨어져 3분의 1 정도가 없어져버렸다. 두광은 두 겹의 선으로 둥글게 표현되었고, 그 안에 당초문과 중심에 연꽃무늬를 새겼다. 신광은 2중선을 새겨 선과 선 사이에 당초무늬를 나타냈으나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테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는데, 이 역시 불명확한 편이다.
중대 중앙의 구멍에는 사리 장치가 있었는데, 도난당했다가 현재는 부산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이 사리호(舍利壺)의 표면에 15행 136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영태(永泰) 2년, 즉 766년에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석남암사(石南巖寺)에 봉안한다는 내용으로서,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의 조성과 조각사 편년 및 사상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