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 경기 지역과 서도지방에서 불리는 잡가 중 서서 소리하는 선소리의 대표 곡목.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현, 중요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종류는 경기 산타령과 서도(西道) 산타령이 있고, 각각 <놀량> · <앞산타령> · <뒷산타령> · <자진산타령>으로 되어 있다. <자진산타령>은 경기에서 <도라지타령>이라 하고, 서도에서는 <경발림> 또는 <경사거리>라고도 부른다.
흔히 <산타령>의 시초는 조선 말기 오강(五江)으로 불린 한강 · 용산 · 삼개[麻浦] · 지호(支湖) · 서호(西湖) 등의 소리꾼들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재효(申在孝)의 <박타령>과 <변강쇠타령>에 사당패들이 나와서 <놀량>을 비롯한 <산타령>을 부르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고종 연간의 오강의 소리꾼들을 <산타령>의 시초로 잡기는 어려울 것 같다.
1915년에 간행된 ≪무쌍신구잡가 無雙新舊雜歌≫에는 지금의 <놀량>을 <판염불>이라 하여 “진국명산망장봉에 청천삭출금부용 음도로 시법이라……”고 하여 운문의 불가어(佛家語)로 시작하다가 한참 뒤에야 “산천초목이”가 나온다.
이렇게 <산타령>에 불교와 관계가 있는 <판염불>이 나오는 이유는 창자(唱者)들이 원래는 사당패들로서 수백 년 전부터 민가나 절로 떠돌면서 매창매기(賣娼賣技)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부르는 소리 중에 <산타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뒤 고종 연간에 서울 오강의 소리꾼들이 <산타령>을 불렀다. 이때 의택이 나타나 선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후 의택-종대-신낙택(申洛澤)의 계보로 전승되었다. 신낙택 이후로는 이들의 가락을 서울 주변의 소리꾼들이 익혀 여러 곳에 선소리패가 생겼다. 뚝섬패 · 한강패 · 쇠봉구패 · 용산삼개패 · 동막패(東幕牌) · 성북동패 · 왕십리패 · 진고개의 호조(戶曹)다리패 · 배오개의 마전다리패 · 과천의 방아다리패 · 자하문밖패 등이 당시에 이름을 날렸는데, 이 중에 뚝섬패가 으뜸이고 과천의 방아다리패가 그 다음이었다 한다.
뚝섬패에서는 이태문(李泰文)이 신낙택에게 배워 황기운(黃琪運) · 이동식(李東植) · 이동운(李東運:이동식의 아우)에게 전하였는데, 이들은 모두가 선소리의 명창으로 알려져 있다.
과천패는 소완준(蘇完俊) · 한인택(韓仁澤)이 유명하였다. 왕십리패에는 명창 이명길(李命吉)을 비롯하여 하순일(河順一) · 엄태영(嚴泰泳) · 탁복만(卓福萬) · 이명산(李命山) 등이 활약하였고, 진고개의 호조다리패에는 월선(月仙) · 김응렬(金應烈) · 김병규(金炳奎), 배오개의 마전다리패에는 박삼쇠(朴三釗) 등이 그 이름을 날렸다.
그 뒤 1920·1930년대에 이르러 패의 개념이 차츰 사라지고 대신 원각사나 광무대 또는 극장무대를 중심으로 불렸다. 최석조(崔錫祚) · 최정식(崔貞植) · 김태봉(金泰鳳) 등이 선소리를 잘하였다. 이명길 · 엄태영 · 김태운 · 최정식 등은 잡가 명창인 최경식(崔景植) · 박춘재(朴春載) 등에게 경기잡가를 공부해서 이 무렵부터 선소리 명창이 잡가[座唱] 명창을 겸하게 된다.
전수기관으로는 패들이 활약하던 고종 연간에는 공청(公廳:파움인 경우가 많다)이 소리꾼들의 공연장이요 수련장이었다. 그러다가 민족항일기에는 권번(券番:일제시대에 있었던 기생조합)을 통하여 전수되었고, 광복 뒤에는 최경식이 소속한 대한국악원을 중심으로 전승되었으나, 6·25전쟁을 만나 침체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창배(李昌培)가 청구고전성악학원(靑丘古典聲樂學院)을 만들어 가르치자 많은 신진들이 배출되었고, 특히 1954년에 ≪가요집성 歌謠集成≫을 간행한 뒤 계속 증보시켜 1976년에 ≪한국가창대계 韓國歌唱大系≫를 완성한 뒤부터 완전히 정립되었다. 따라서 <산타령>의 발전과 정립에는 이창배의 힘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서울 강남구에 선소리보존협회를 두고 전수교육을 하고 있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이명길에게 배운 이창배, 소완준에게 배운 정득만(鄭得晩), 김태봉의 문하에서 배운 김순태(金順泰), 그리고 유개동(柳開東)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들의 후계자로는 박태녀(朴泰汝) · 최창남(崔昌男) · 황용주(黃龍周) · 윤종평(尹鍾平) · 조순자(趙順子) 등이 있으며, 1998년 현재 황용주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서도의 산타령은 서울의 산타령이 옮겨간 것이다. 이는 <산타령>의 시조라 할만한 의택과 종대가 평양에 가서 부벽루에 올라 <산타령>을 불렀는데, 당시의 서도 명창인 허득선(許得善)과 임방울(林芳蔚)이 이를 듣고 모방하여 서도 산타령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서울에도 올라와 서도 선소리를 불러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서도 선소리는 평양의 날탕패에 의하여 널리 퍼졌는데, 문영수(文泳洙) · 이정화(李正華) 등이 유명하였고, 서울에 올라와 원각사에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평양에서는 양세진(梁世振)이 선소리를 잘하였고, 또 김종조(金宗朝) · 최순경(崔順慶) · 김칠성(金七星) · 김주호(金周鎬) · 이인수(李仁洙) 같은 서도 잡가의 명창들도 <산타령>을 잘 불렀다. 서울에서는 박춘재 · 최정식 · 박인섭 · 김태운 · 유개동 · 김경호 · 원경태 등 경기소리 명창들이 문영수 · 이정화에게 서도소리를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산타령>은 경기 · 서도의 구별 없이 선소리 명창들이면 다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산타령> 중 <놀량>의 불가어 부분은 오강의 소리꾼들이 부르기 시작하면서 따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솔 · 라 · 도 · 레 · 미의 5음계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솔 · 도 · 미 3음이 많이 나오며, 장 · 단3도 진행이 현저하다. <놀량>에서 시작하여 <앞산타령>을 거쳐 <뒷산타령>에 이르기까지 그 한배는 점점 빨라지며 <자진산타령>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산타령>에 맞추어 소고를 치며 춤추는 발림춤도 느린 <놀량>에서보다는 빠른 <뒷산타령>과 <자진산타령>에서 더욱 흥이 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차츰 빨라지는 한배는 마치 <영산회상>이 <상영산>에서 <중영산> · <세영산>을 거쳐 <가락덜이>에 이르는 과정과 비슷하고, 전체적으로 퍽 씩씩한 맛이 난다.
서도 산타령은 경기소리를 배워서 부른 것이어서 경기 산타령과 음악적 특징이 대개 비슷하나, 한배와 리듬이 빠르고 규칙적이며 세련된 무용성(舞踊性)을 띠고 있다.
경기와 서도 산타령을 구성하고 있는 각 곡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놀량:경기 <놀량>은 일정한 형식과 장단이 없고 통절형식(通節形式)이며 넓은 음역을 지니고 고음을 많이 쓴다. 서도 <놀량>은 경기 <놀량>의 후반과 같고 통절형식이며, 처음에는 느리게 시작하다가 점점 빨라지며 세마치 · 도드리 · 자진타령장단을 섞어서 친다. 경기 <놀량>을 <구놀량>, 서도 <놀량>을 <신놀량>이라고도 하였다.
② 앞산타령:경기의 것은 서울 근처에 있는 산을 주제로 하고 유절형식(有節形式)이며, 일정한 장단이 없고 고음을 많이 쓴다. 서도의 것은 유절형식에 세마치장단을 쓴다.
③ 뒷산타령:경기의 것은 <중거리>라고도 불리고 유절형식에 리듬과 음역은 <앞산타령>과 같고, 한배는 조금 빠르다. 서도의 것은 유절형식이며, 한배는 경기의 것보다 갑절이나 빠르고, 장단은 일정하지 않지만 4박자의 빠른 타령장단이 나올 때도 있다. 가락은 경기의 것과 거의 같다.
④ 자진산타령:경기의 것은 일명 <도라지타령>으로도 불리고, 처음은 느리게 부르다가 빠르고 경쾌한 4박자 장단으로 바뀐다. <뒷산타령>의 파생곡으로 음악적 특징도 또한 같다. 서도의 것은 일명 <경사거리> · <경발림>으로 불리고 유절형식이며, 그 음악적 특징은 경기의 것과 같고, 선율도 비슷하여 서로 혼동될 경우가 가끔 생긴다. →선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