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설신은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에서 상서좌복야,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순창군 호장의 증손이며, 외가도 순창군 호장이었다. 그는 시부와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어 과거를 거쳐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232년(고종 19)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과중한 공물 징수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전하였으며 그해 재침한 몽골군에게 억류되었다가 처인성 승첩 이후 풀려나기도 하였으며, 1242년(고종 29) 동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다. 1251년(고종 38)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묘지명이 전하고 있다.
정의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에서 상서좌복야,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
그 뒤 식목도감(式目都監) 녹사(錄事), 대관승(大官丞), 비서랑(祕書郎), 추밀원(樞密院) 당후관(堂後官), 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을 거쳤다. 1227년(고종 14)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郎)으로 용주(龍州)의 수령이 되었으며, 다시 병부(兵部)·이부(吏部)의 원외랑을 역임하고, 1231년(고종 18)에는 내시(內侍)에 입적되었다.
몽골 침입기인 1232년(고종 19) 시어사(侍御史)로서 몽골에 사신으로 가서 과중한 공물(貢物)의 징수에 관한 고려의 입장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해 재침략한 몽골의 살리타이[撒禮塔]에게 억류되어 몽골군 지휘부를 따라갔다가, 살리타이가 처인성(處仁城)에서 김윤후(金允侯)와 처인부곡민(處仁部曲民)들에게 사살되자 비로소 풀려났다. 대부소경(大府少卿) 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1234년(고종 21) 충주부사(忠州副使), 이어서 호부(戶部)·예부(禮部)의 시랑(侍郞),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등을 지냈다.
1242년(고종 29)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지공거(知貢擧) 김창(金敞)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홍지경(洪之慶)·한유선(韓惟善) 등을 선발하였다. 다음 해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갔다가, 누차 옮겨 국자감(國子監) 대사성(大司成)·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등을 거쳤다. 1251년(고종 38)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형부상서(刑部尙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고, 이해에 죽었다. 김백일(金百鎰, 金坵)이 지은 그의 묘지명(墓誌銘)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설신 묘지명(薛愼墓誌銘)」
단행본
- 김용선 편,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논문
- 윤용혁, 「몽고의 2차침구와 처인성승첩」 (『한국사연구』 29, 한국사연구회, 1980)
주석
-
주1
: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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