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응경(應卿), 호는 장암(場巖). 성개(成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희(成熺)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성담년(成聃年)이다. 어머니는 김박(金博)의 딸이다. 영의정 상진(尙震)의 매부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나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보고 벼슬을 단념, 물러나 있었다. 그러다가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에 발탁되었다.
곧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옮겨 있으면서 최숙생(崔淑生)과 함께 군덕(君德)과 치도(治道)에 관한 9잠(九箴)을 지어 병풍으로 만들고는 왕에게 올렸다. 이어 대사간·동부승지 등을 거쳐 차례로 승지직을 역임하면서 도승지가 되었다.
1509년(중종 4) 이조참판이 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려 있는 대선취재급첩조(大禪取才給牒條)가 사실상 도첩제(度牒制)의 폐지로 불필요한 데도 이를 남겨두었다가 혹 숭불(崇佛)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여 이 조목의 삭제를 주장하였다.
그 뒤 대사헌으로 하산군(夏山君)에 봉해졌다. 이어 병조참판·한성부좌윤을 거쳐 1515년 예조참판이 되었을 때,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비)의 상(喪)을 만나 염습(殮襲)을 조속히 거행하라는 왕명에 반대하여 상례법에 따르게 하였다. 이어 한성부판윤으로 전임되었다가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타고난 성품이 단아하고 순수하였다. 학문에 힘쓰며 남과 다투기를 피하고 사람을 아꼈었던 관계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와 가까웠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양경(襄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