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회(景晦)·중회(仲晦), 호는 사암(思菴). 성효연(成孝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좌랑 성완(成玩)이고, 아버지는 감찰 성희문(成希文)이다. 어머니는 승지 강경서(姜景漵)의 딸이다. 성희혁(成希赫)에게 입양되었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28년(중종 23) 식년시에서 생원과 진사에 모두 급제하고, 1540년(중종 35) 진사로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1544년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사헌부지평, 1547년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교리가 되었고 다시 의정부검상이 되었다. 이후 사도시정(司䆃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직하면서 『중종실록(中宗實錄)』·『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8년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경기도암행어사, 이어서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등을 지냈다. 1551년 동부승지로 참찬관(參贊官)을 겸직하고, 2년 간 승진을 거듭하며 여러 승지를 역임한 뒤 1554년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155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홍문관부제학을 거쳐 그 뒤 대제학·공조참판·대사간·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1563년 한성부좌윤·함경도관찰사, 1565년 형조참판, 1567년 형조판서·한성부판윤·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 등극사(登極使)의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예조와 호조의 판서에 이어 우참찬이 되었다. 1576년 다시 예조판서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이기(李芑)가 구수담(具壽聃)에게 죄를 주려는 데 대한 잘못을 논박하기도 하였다. 또 윤원형(尹元衡)에게 관리를 능력에 따라 등용해야지 사사로이 권세를 이용하여 매관매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충고를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