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곳은 채선견(蔡先見)이 정자(亭子)를 짓고 만년에 학문을 강론(講論)하던 곳이다. 그 뒤 후손들이 선생의 높은 덕행을 널리 기리고자 새로 수축하고 그 이름을 성재서당이라 개칭하였다.
채선견은 채응린(蔡應麟)의 다섯째 아들로 지산(芝山)조호익(曺好益)과 한강(寒岡)정구(鄭逑) 양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17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그 후 서궁유폐사건(西宮幽閉事件)이 일어나자 마을 선배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발분창의(發憤倡義)하여 향병(鄕兵)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수집하였다. 1626년에는 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귀향하여 이곳에 성재정(成才亭)을 짓고 선비들과 학문을 강론하면서 만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