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병여(炳如). 성오(成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여용(成汝瑢)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성운한(成雲翰)이다. 어머니는 원진하(元振河)의 딸이다.
1666년(현종 7)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과 홍문관전적(弘文館典籍)을 지내고 예조·병조의 좌랑과 고산찰방(高山察訪)·함경도사(咸鏡都事)를 지냈다. 1672년에 사헌부지평, 이듬해 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에 오른 성호징은 당시 같은 노론이던 민정중(閔鼎重)과 김만중(金萬重)·이숙(李䎘)·이선(李選) 등이 남인에게 몰려 죄를 입게 되자, 구명 활동을 벌이다 죄를 입어 강계에 유배되고 이듬해 풀려났다.
숙종 즉위 직후 남인 윤휴(尹鑴) 등이 집권하자 두문불출하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정언에 복직하였다. 1682년에는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어서 장령·지평을 거쳐 죽산부사 재임 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여러 개 세워졌다.
1684년 사간으로 있으면서 남인 허목(許穆)·홍만조(洪萬朝)·이현조(李玄祚) 등의 죄를 논했고 이어서 동부승지·좌승지·판결사·형조참의·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88년에 여주목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쫓겨나자 다시 두문불출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뒤 민비(閔妃: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으나, 남구만(南九萬) 등 소론파들의 집권으로 관직에 적극적인 참여는 못하고 다만 판결사에 제수되었다. 당쟁이 극심하여 노론으로서의 30여 년 관직 생활이 평탄하지는 못하였다. 개인적인 인품은 후덕하고 애군(愛君)·효친이 지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