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사재감참봉, 상의원주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공선(公先), 무선(茂先)
야은(野隱)
시호
충현(忠顯)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88년(선조 21)
사망 연도
1637년(인조 15)
본관
은진(恩津: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
주요 관직
사재감참봉|상의원주부
관련 사건
병자호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사재감참봉, 상의원주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공선(公先) 혹은 무선(茂先), 호는 야은(野隱).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좌랑 송방조(宋邦祚)이며, 어머니는 감정(監正) 정곡(鄭谷)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종형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인조 초년에 향인들에 의해 학행이 감사에게 천거되기도 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를 모아 왕을 가까이서 보필하였다.

이듬해 김장생에 의하여 천거되어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을 제수받고, 봉사(奉事)·직장(直長)·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남에 왕명을 따라 강화도의 분사(分司)에 들어갔다.

이듬해 정월 22일에 강화성이 적에 의하여 포위되고 남문이 함락되자 김상용(金尙容)·홍명형(洪命亨)·심현(沈誢)·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이 해 정려가 세워지고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충현(忠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강화도의 사람들이 충렬서원(忠烈書院)을 세워 김상용과 함께 제향하였다. 이밖에 회덕의 별사(別祠),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송자대전(宋子大全)』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조야첨재(朝野僉載)』
『속잡록(續雜錄)』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