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는 물과 육지의 외로운 영혼과 아귀들을 공양하고 구제하는 법회의 경문을 다룬 불교 의례서이다. 1467년부터 1694년까지 간행된 판본이 40여 종에 이른다. 그중 1470년(성종 1) 견성사(見性寺)에서 간행한 이 판본은 광평대군(廣平大君)의 부인인 신씨(申氏)의 소원으로 아들 영순군(永順君)이 필사한 것이다. 이 책은 조선 전기 왕실의 불교 신앙과 수륙재 의식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1444년(세종 26)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이 죽자 그의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신씨(申氏)는 광평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묘 옆에 재암(齋庵)을 세우고 비구니가 되었다. 신씨의 법명은 ‘혜원(慧圓)’이었다. 1469년(예종 1) 혜원은 자신의 외아들인 영순군(永順君)에게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의 판각용 정서본(淨書本)을 필사하게 하였고, 영순군은 그해 봄에 시작하여 늦은 여름 필사를 마쳤다. 그 다음 해 3월 영순군이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영순군의 부인인 최씨(崔氏)도 출가하여 ‘선유(善柔)’라는 법명의 비구니가 되었다. 이들 고부는 광평대군과 영순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도인(道人) 해자(海慈)의 주간 아래 견성사(見性寺)에서 정서본을 판각하게 하였으며,1470년(성종 1) 6월에 완성시켰다.
본문 판각에 전녹동(全祿同), 김귀손(金貴孫), 전천동(全千同) 등 당대의 이름 있는 각수들이 참여하였다. 책의 마지막에는 영순군이 1469년 여름에 쓴 발문과 김수온(金守溫)이 1470년 6월에 쓴 발문을 수록하고 있다. 영순군은 '고려시대부터 재의(齋儀)를 다룬 책들은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가 일상에서 간편하게 사용되었다. 모친인 신씨가 구판에는 빠진 글자가 많고 유통되는 책이 드물었기에 새로이 간행하기를 소원하여 자신에게 정서본을 필사하게 했다'고 책의 간행 경위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발문 뒤로는 광평대군, 무안군(撫安君), 신씨의 아버지 신자수(申自守) 등 10여 영가(靈駕)와 신미(信眉), 학열(學悅), 학조(學祖)를 비롯하여 무려 200여 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호림박물관 소장본에는 두 곳에 혜원의 인장이 찍혀 있어 광평대군 부인 신씨가 소장하고 있었던 구장본(舊藏本)으로 보인다.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는 조선 전기 왕실에서 잇달아 간행한 여러 종의 수륙재 관련 의식서 중 하나이다. 비슷한 책으로 1469년 6월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가 남편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삼각산 도성암(道成菴)에서 간행한 『천지명양수륙재의촬요』도 있다. 따라서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는 조선 전기 왕실의 불교 신앙과 왕실 간행 불서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