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에 관한 우리의 문헌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일본 측의 기록과 일본에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의 양식과 그 가운데 하나인 『묵죽화책(墨竹畵冊)』에 나타난 관기(款記)에 의하여 그가 조선 초기에 일본에 건너가서 활약하던 화가라고 믿어진다.
일본에 있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묵죽화책』은 동경(東京)의 마쓰다이라(松平康東)의 수장품으로 모두 열 장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제일 마지막 장에 “영락갑진(1424), 스물두 살 되던 해 일본국에 내도하여 북양에서 그렸다(永樂甲辰二十有二歲次於日本國來渡 北陽寫 秀文).”는 관지(款識 : 글자 따위를 음각한 것과 양각한 것을 아울러 이르는 말)가 있다.
이어서 ‘秀文(수문)’이라는 양각 방인(陽刻方印 : 돋을 새김의 네모난 도장)이 찍혀 있다. 이에 의하여 그가 22세 때인 1424년(세종 6년)일본에 가서 이 『묵죽화책』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에 관해서는 일본 측의 문헌인 『변옥집(辨玉集)』과 『화공편람(畵工便覽)』에 그가 명나라에서 왔으며 소가파(曾我派)라는 화파의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부상명공화보(扶桑名公畫譜)』라는 일본 문헌에는 명나라 초의 화가 이재(李在)의 자(字)가 주문(周文)이며 소가씨(曾我氏)의 사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문과 주문의 일본말 발음이 모두 ‘슈분’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에 나타난 주문을 수문과 혼동하여 수문을 이수문(李秀文)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수문이 과연 이씨였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확실한 근거가 없다.
다른 견해도 있다. 일본인으로서 1423년에 우리 나라에 왔다가 1424년, 즉 수문이 『묵죽화책』을 그린 해에 귀국한 ‘슈분(周文)’이라는 수묵화가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그의 수묵화 양식이 조선 초기의 수묵화 양식, 또는 수문의 수묵화 양식과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므로 ‘슈분’과 수문이 같은 사람이라는 견해이다.
수문의 대나무 그림의 특징은 대나무 줄기와 잎이 극히 가늘고 잎의 길이가 대나무 크기에 비해서 무척 긴 것 등이다. 또한 보통 문인 묵죽화(文人墨竹畵)에는 대기(大氣)나 안개의 느낌을 표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수문의 그림에는 이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수문의 대나무 그림과 양식상으로 비교가 될 만한 조선 초기의 묵죽화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연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박팽년(朴彭年)의 작품으로 전하는 묵죽화, 또는 그 다음으로 가까운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작품으로 전하는 묵죽화도 대체로 세죽(細竹)이라는 점 이외에는 별다른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수문의 『묵죽화책』은 연대가 가장 이른 조선 초기의 기년작(記年作)이라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작가의 정체나 그림의 양식 등 많은 의문점을 내포하고 있다. 수문의 수묵화로는 『묵죽화책』에 찍힌 것과 같은 도장이 찍힌 작품으로 「임화정도(林和靖圖)」, 지금은 없어진 「고목구도(枯木鳩圖」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도장이 찍힌 「악양루도(岳陽樓圖)」와 「향산구로도(香山九老圖)」가 역시 일본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