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제는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의 옛 수산현에 있던 고대 수리 시설이다.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와 함께 삼한시대 3대 수리 시설로 알려져 있다. 기록상으로 고려 후기에 김방경이 제방을 쌓고 관개를 하여 일본 정벌을 위한 군량미를 비축하였다는 것과 1467년(세조 13)에 조석문이 제방을 수축하여 국둔전을 만들었다는 사실 등이 전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황폐화하였다. 고종 때 다시 제방을 증축하였고, 갑오개혁 이후 관유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사유지가 되어 농지로 개간되는 등 변화를 겪어 현재 본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1986년 11월 손정태(孫正泰) 밀양문화원 이사가 수문을 발견하였으며, 밀양 수산제 수문이 1990년 12월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후 수문의 성격 규명을 위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수문지에 대한 기초조사를 1992년 12월 22일부터 1993년 1월 5일까지 실시하였다.
고대 수리 시설로 여겨지나 역사적으로 많은 변화를 거듭하여 구체적인 용도나 성격이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시대 1467년(세조 13) 체찰사(體察使) 조석문(曺錫文)이 왕명을 받들어 제방을 쌓고 국둔전(國屯田)을 설치하였다는 사실은 사료로 확인되는바, 이 국둔전의 경영을 위해 수산제(守山堤)가 이용되었음은 확실하다. 다만, 관련 사료와 현대에 발견된 수문의 위치 등을 살펴볼 때 당시의 수산제는 관개용이기보다는 방수용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낙동강과 그 지류인 용진강의 범람으로부터 국둔전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고려 말에 김방경(金方慶)이 쌓은 것과 그 이전의 수산제 모습은 재구하기 어렵다. 이후 1467년 조석문이 축조한 것은 낙동강 좌안의 당말리산과 양동리 서편 도연산 사이의 침식성 구릉 사이를 따라 흙을 쌓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1986년 발견된 수문 역시 이때 설치한 것이 아닐까 한다. 임진왜란 이후 황폐해졌다가 조선 후기 고종 때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또한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양상을 확인하기 어렵다.
수산제는 국둔전보다 낮은 곳에 축조되었으며, 수문은 그중 가장 낮은 하천 쪽에 있다. 따라서 수문은 관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배수와 제내의 수위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지하 암반을 뚫은 터널식 수문은 장기간의 배수에도 수로 및 수문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수문은 암반을 깎아서 빈지형으로 제작하였고 안팎에서 이중으로 갑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배수의 양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개간에 의해 일정 구간 남아 있던 제방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서 제방을 비롯한 수문의 용도 및 수리 시설로서의 기능 등을 재구하기 어려운 상태이며, 더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대체로 이제까지는 물을 저장하는 관개시설로 보는 견해가 강하였으나 낙동강의 범람에 대비한 방수용 시설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다른 고대 수리 시설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수문은 향후 학술적 연구가 더 필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