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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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당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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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이나 흐르는 물 등을 둑을 쌓아 가두어 두었다가 필요한 시기에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인공 수리 시설.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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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저수지는 빗물이나 흐르는 물 등을 둑을 쌓아 가두어 두었다가 필요한 시기에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인공 수리 시설이다. 제(堤), 지(池), 제언(堤堰), 택(澤)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데, 순우리말은 ‘못’이다. 수원은 샘처럼 솟는 물, 흐르는 작은 개울, 큰 하천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기후상 건기와 우기가 구분되는 지역에 유용한데, 강우량이 많은 여름철에 주로 취수하여 저장하고, 가뭄이 심한 봄철 모내기 때나 농사철에 배수하여 관개용으로 사용한다. 오늘날은 홍수 조절용, 식수용, 공업용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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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빗물이나 흐르는 물 등을 둑을 쌓아 가두어 두었다가 필요한 시기에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인공 수리 시설.
내용

저수지는 보(洑)와 함께 대표적인 전통 수리 시설이다. 주로 산곡에 축조하여 물을 저장해두었다가 저수지 아래의 들에 관개(灌漑)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지역이고 산곡을 벗어난 주1 지역에 충적토 들판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이런 들판에 관개를 위해서는 보를 이용할 수도 있으나 수원이 부족할 경우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한기에 물을 저장해두었다가 농사철에 사용할 수 있다. 큰 하천 유역의 경우도 범람으로 이루어진 넓은 들이 있는데, 이 경우는 저수지를 축조하되 수원으로 하천수를 끌어서 저장해두었다가 사용한다. 전자의 저수지는 산곡형이고, 후자는 평야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산곡형은 평야형보다 축조가 더 쉽고 수심이 깊어 저수율도 높다. 대체로 지형의 특성상 계곡 안쪽이 넓은 산곡의 입구를 막아 저수지를 축조하는데, 이런 경우 저수를 쉽게 할 수 있고, 축조에 필요한 재료와 노동력 등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이와 달리 평야형은 개활 지역에 축조한 것으로 제방이 차지하는 비율이 산곡형에 비해 현저하게 높다. 그리고 평야 지역이라 수심은 얇고, 저수지 축조로 인한 침수면적이 크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저수지의 축조 자체만 고려하면 산곡형에 비해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침수로 인해 잃는 것보다는 관개로 인해 발생하는 이득, 즉 몽리(蒙利)가 더 크다고 판단할 때 대규모 재료와 인력 동원을 통해서라도 축조하게 된다.

평야형 저수지는 대체 수원이 개발되면 경지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당진 합덕제의 경우 삽교천의 운정양수장과 예산저수지의 건설 등으로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으며, 김제 벽골제는 동진수리조합에서 1928년 섬진강운암제(雲岩堤)를 건설하고 유역변경에 의해 관개 수원을 동진강으로 돌림으로써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반면에 산곡형 저수지인 제천 의림지(義林池)는 오늘날까지도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저수지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둑이 튼튼해야 한다. 저수지의 제방을 쌓은 방법은 전통적으로 여러 가지다. 대표적인 것이 무리말뚝공법과 부엽공법(敷葉工法)이다. 무리말뚝공법은 말뚝을 지반에 수직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 말뚝 무리[群]를 형성하여 쌓은 흙이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엽공법은 점토에 이나 나뭇가지 혹은 나뭇잎 등을 층층이 반복적으로 다져서 쌓은 후 굵은 모래를 쌓고 다시 점토층과 모래층을 번갈아 쌓는 기법이다. 굵은 모래를 깐 것은 수분 조절과 토양 수축 등을 고려한 것이고, 짚이나 나뭇가지 등 식물 유기물을 점질토와 함께 까는 것은 흙이 단단하게 다져지도록 하여 연약한 지반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다. 부엽공법은 고대부터 널리 사용되었던 전통 토목 기술로 저수지나 성벽 축조 등에 주로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목책(木柵)을 겹겹이 세우고 거기에 흙을 메워서 축조하는 판축(板築) 방법도 있다. 제방을 다 쌓은 뒤에는 둑에 버드나무나 소나무 혹은 그 외 잡목 등을 심어 제언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저수지 축조는 위치한 곳의 지형과 동원 가능한 노동력이나 기술 등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저수지를 관개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수(引水) 장치를 갖추어야 한다. 별도의 인수 장치 없이 둑을 헐어서 사용하는 예도 있긴 하지만 인수 장치가 있을 때 효율적인 물 관리가 가능하다. 인수 장치로는 수갑(水閘)과 수통(水桶)이 있다. 벽골제의 경장거(經藏渠)와 장생거(長生渠) 같은 형태의 수문이 수갑이며, 저수지의 바닥에서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을 매설한 것이 수통이다. 벽골제의 수갑은 빈지형으로 위에서부터 수문을 한 짝씩 들어 올려 배수하는 방법이다. 이 외에 수문의 짝마다 배수용 구멍을 뚫어 막아놓았다가 위에서부터 하나씩 열어서 배수하는 방법도 있다. 조선 후기 화성(華城)의 만석거(萬石渠), 만년제(萬年堤), 축만제(祝萬堤)의 수갑은 입체식 매장형으로 매우 정교하면서도 기능이 뛰어나다.

수통은 저수지의 안에서 밖으로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한 장치로 저수지의 바닥 부근에 묻어 설치한다. 이것은 지하관으로 저수지 안의 수통 입구를 여닫아서 관개와 저수를 하는 구조이다. 그리고 이런 수통에 물구멍을 일정 간격으로 뚫은 수직관을 부착한 형태도 있다. 전자는 저수지의 물을 관개하려면 사람이 잠수하여 막아놓았던 수통의 입구를 열어주어야 하고 반대로 저수하려면 막아야 한다. 이와 달리 후자는 깊이 잠수하지 않고도 물구멍을 여닫음으로써 배수와 저수를 할 수 있다. 수통은 대제(大堤)에는 3개, 중제(中堤)에는 2개, 소제(小堤)에는 1개를 설치하도록 한 호조(戶曹)의 제언 관리 지침이 세조 때 제정되었다.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수지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장치 중의 또 하나는 만수(滿水)의 위험을 대비하는 안전장치이다. 물이 부족할 때는 저수지 자체의 안전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수위가 높아지면 제방이 위험해진다. 그래서 저수지는 일정 수위 이상의 물은 저장하지 않고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장치가 무넘이이다. 물이 넘어가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달리 월수처(越水處), 토수구(吐水口), 여수구(餘水口)라고도 한다. 제방에서 무넘이는 주로 가 쪽에 위치하며 암벽과 같이 지반이 견고한 곳을 선택하여 설치한다. 그 이유는 많은 물이 넘쳐흘러 내려가더라도 제방이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제천 의림지의 경우 무넘이는 용추폭포 근처로 나 있다. 폭포가 있는 곳은 지형이 암반으로, 상시로 물이 흐르더라도 침식이 일어나 무너질 위험이 없다.

이 외에도 저수지는 일정 기간마다 준설 작업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위가 낮아져 저수지의 기능을 상실한다. 이런 경우 저수지 안에 경작이 이루어지는 주2 사례가 전통사회에서는 많았다.

저수지는 수리 시설 중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특히 벼농사와 관련하여 그 역사가 또한 깊다. 오늘날도 우리나라 논 면적 중에서 저수지를 통한 수리 면적이 가장 넓다. 전체 관개 답의 70% 정도를 차지한다. 대부분의 벼농사가 저수지에 의지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저수지의 소유 및 운영관리는 간혹 사유(私有)도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대개 국유(國有)였다. 저수지의 몽리답 역시 둔토(屯土), 역토(驛土), 궁장토(宮莊土) 등이 많았다. 그래서 저수지의 축조 또한 국가 차원에서 역군(役軍)을 동원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는 1415년(태종 15)에 이루어진 벽골제 중수(重修)공사이다. 당시 제방 공사는 임금의 허락을 받아 농한기인 9월 갑인일(甲寅日)에 시작하여 10월 정축일(丁丑日)에 마쳤는데, 동원 인력은 각 군(郡) 장정 총 1만 명과 간사(幹事) 300명을 증발하여 행한 역사였다. 감독은 옥구진병마사(沃溝鎭兵馬使) 김훈(金訓)과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김방(金倣)이었다.

구체적인 공사의 방법도 언급되는데, 둑 공사는 먼저 조수가 치는 곳에 방죽을 쌓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기둥을 세우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다섯 겹으로 목책을 세운 다음 흙으로 메웠으며, 제방이 무너진 곳은 흙을 쌓아 편평하게 하고, 제방의 안팎으로 버드나무를 두 줄로 심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장생(長生) · 중심(中心) · 경장(經藏) 3개의 거문(渠門)도 수압에 견딜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여닫기 편리하도록 보수하였다. 당시 사용한 재료, 제작 방법, 크기 등이 중수비(重修碑)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저수지는 위치한 곳에 따라 몽리답으로 인수하는 방법 또한 다양하였다. 벽골제의 경우는 평야형 저수지로 바로 아래에 몽리답이 펼쳐져서 수문을 열어 바로 관개를 할 수 있었지만, 산곡형 저수지는 몽리답이 멀리 낮은 곳에 있어 수문을 여는 것만으로 인수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제천 의림지의 경우, 아래에 소규모 보조 저수지를 축조하여 1차 저장하였다가 인수하는 구조였다. 이는 수리 시설과 몽리답 간의 표고차를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벼재배에 적절한 수온 상승의 역할 등을 하였다. 청송 주산지(注山池)의 경우는 역토(驛土) 경영을 위한 것으로 저수지의 물을 계곡으로 1차 방수하여 흐르게 하였다가 보를 통해 다시 인수하는 방식이다. 저수지와 보가 결합하여 있는 구조이다. 이렇듯 저수지는 지리적 특징 및 환경 조건 등에 따라 다양한 축조 및 운영 방식이 있었다.

오늘날 저수지의 관리는 대개 국가에서 담당한다. 한국수자원공사, 한국농어촌공사 혹은 지역 자치단체 등이 관리하며 농민들은 수혜자로서 관리 책임이 없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고 수리계 등을 조직하여 축조와 보수 및 관리 등을 농민들이 직접 담당한 예가 많았다. 이때는 못도감을 선출하여 그를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역사가 오랜 저수지는 축조에 관한 전설이 전해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한 예로 구미시 고아읍 호지(狐池)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언급되는 수리 시설인데, 눈 내린 겨울에 여우가 꼬리로 줄을 그어 놓아 그것을 따라 둑을 쌓았다거나, 여우가 못둑 모양으로 짚을 나란히 이어 놓아 그 형상대로 둑을 쌓아 완성하였다는 등의 전설이 전한다. 그리고 상주 공검지(恭儉池)에는 둑을 쌓을 때 자꾸 무너져 어려움을 겪다가 ‘공갈’이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를 둑 쌓을 때 묻어서 완성하였다거나, 시주승을 말뚝삼아 묻음으로써 비로소 둑을 완성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참고문헌

원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단행본

양선아, 강성복, 김가람, 김재호, 김효경, 안승택, 오성희, 임경택, 최명환, 『전통 관개지식과 수리문화』(국립무형유산원, 2023)
이광린, 『이조수리사연구』(한국연구도서관, 1961)

논문

김재호, 「수리 문화유산과 전통지식」(『무형유산』 14, 국립무형유산원, 2023)
김재호, 「전통 수리시설 축조 관련 전설과 전통지식」(『무형유산』 12, 국립무형유산원, 2022)
김재호, 「청송 주산지의 역사와 수리공동체」(『한국문화』 97,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2)
김재호, 「정조 대 수원화성 수리시설의 특징과 수리사적 의의」(『역사민속학』 51, 한국역사민속학회, 2016)
김재호, 「제천 의림지의 수리사적 특징과 의의」(『민속학연구』 32, 국립민속박물관, 2013)
주석
주1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 강물이 운반하여 온 모래나 흙이 쌓여 이루어진 편평한 지형. 우리말샘

주2

땅 임자의 허락 없이 남의 땅에 농사를 지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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