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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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물체의 형상을 비추어보는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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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거울은 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물체의 형상을 비추어 보는 물건이다. 평면 유리 한 면에 수은을 발라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거울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동경이다. 현재와 같은 유리 거울은 1883년 인천에 판유리 공장이 설립되면서부터 사용되었다. 거울의 용도는 사람의 용모를 비추어 보는 것에 외에도 다양하다. 무당에게는 점을 치는 도구로, 통치자에게는 통치권의 상징물로 이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거울을 반으로 쪼개어 증표로 삼기도 했다. 거울과 관련된 속신들도 생겨났다. ‘꿈에 거울을 받으면 아들을 낳는다’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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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물체의 형상을 비추어보는 물건.
내용

평면유리 한 면에 수은을 발라 만든다. 거울[鏡]의 발명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초의 거울은 석경(石鏡)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거울을 ‘색경’(석경의 음전)이라고 부를 만큼 석경은 오랫동안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거울은 서기전 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경(銅鏡)이다. 이는 청동기시대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삼국시대 · 고려시대조선시대까지도 사용되었다. 때로는 은으로 만든 은경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둥근 모양으로 한가운데 꼭지가 있고, 한쪽 면에는 여러 가지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드문 예로, 양면 거울이 있고, 지름이 한 자 가량인 대형이 있는 반면에 한 치에 지나지 않는 휴대용도 있다. 큰 거울은 경가(鏡架)에 걸어놓고 사용하였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된 고려시대의 경가를 보면 앉아서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45°쯤 기울일 수 있게 되어 있다. 서서 보기에 편한 등신대의 경가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초기의 거울은 모두가 지금과 같이 선명하게 비추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가 묻어도 잘 닦아지지 않는 결점이 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관아에 거울제조기술자인 경장(鏡匠)을 두어 거울을 만들게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시전에서 거울을 판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 현재와 같은 거울이 제작된 것은 1883년 인천에 판유리공장이 설립되어 유리가 양산됨으로써 얼굴을 비추는 면경(面鏡)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경대 및 체경도 아울러 대중화하였다.

한편, 거울의 용도는 사람의 용모를 비추어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 사용례가 매우 다양하였다. 옛날 무당들이 사용하던 세 가지 무구(巫具)는 칼 · 방울 · 거울로, 무당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집을 나간 사람이나 잃어버린 물건의 행방을 점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용례를 근거로 고대의 거울이 무당의 장식품이자 주구(呪具)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왕창근(王昌瑾)이 가지고 온 고경(古鏡)에 새겨진 글자를 해석하여 용기를 얻어 고려 건국을 결심하였고, 조선 태조 이성계는 거울이 깨지는 꿈을 꾸고서 길몽이라는 해석에 자신감을 얻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경상북도 포항시 송라면 내연산 기슭에 위치한 보경사(寶鏡寺)는 신라 선덕여왕 때에 창건된 사찰인데, 창건 당시에 8면경을 내연산 아래 용당호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거울이 신기(神器)이었거나 통치자의 상징물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옛날에 만들어진 석경 · 은경 · 동경 · 백동경을 보면 대부분 한쪽 면만 비추어보도록 되어 있으며, 다른 면에는 여러 가지 무늬나 글씨가 조각되어 있다. 인물 · 누각 · 신선 · 산 · 나무 · 꽃 · 새 · 물고기 등의 조각이 있는데, 이는 거울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신기로서 또는 통치자의 상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신라의 진평왕 때 설녀는 아버지의 병역을 대신하여 전장에 나간 가실과 거울을 쪼개어 반쪽씩 가진 다음, 모양이 달라져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거울을 맞추어봄으로써 가실임을 확인한 뒤 혼인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한편, 이몽룡은 춘향과 이별할 때 금낭 속의 명경을 꺼내주며, “대장부의 평생 마음 명경빛과 같은지라, 몇 해가 지나도록 변하지 아니할 것이니, 깊이 간직하고 내 생각이 날제마다 날 본 듯이 열어보라.”고 말하고 있다. 이밖에, 부부가 이혼하거나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질 경우 거울이 깨졌다[破鏡]고 말하는 관습이 있다.

이상과 같이 거울의 다양한 사용 사례는 거울이 신기 혹은 주구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고대에는 거울의 제조가 쉽지 않고 고가이었으므로 고귀한 신분의 유물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생겨난 예일 것이다. 또한,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 거울과 관련된 여러 속신이 생겨났다.

즉, ‘거울을 깨뜨리면 집안이 화를 당한다.’, ‘깨진 거울을 보면 얼굴에 흠이 생긴다.’, ‘깨진 거울을 보면 재수없다.’, ‘정월 초하루 아침에 거울을 깨뜨리면 일년 내내 우환이 떠나지 않는다.’, ‘꿈에 다른 사람을 거울에 비추면 흉하다.’, ‘꿈에 거울을 받으면 아들 낳는다.’, ‘꿈에 거울을 들어서 서로 비추면 먼 곳에서 기별을 듣는다.’ 등이 있다.

‘밤에 거울 보면 소박맞는다.’, ‘새벽에 거울 보면 해롭다.’, ‘산모는 해산 후 아흐레 동안 거울을 보지 않는다.’, ‘어린애에게 거울을 보이면 해롭다.’, ‘음식을 먹으면서 거울을 보지 않는다.’, ‘밤에 거울 보면 쉬 늙는다.’하였고, 환자의 방에 거울을 걸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영혼이 달아나 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조선시대 1월 7일이 되면 왕이 동인승(銅人勝 : 둥글고 자루가 달렸으며 뒷면에 신선을 새김.)을 규장각 벼슬아치들에게 하사하였다고 하며, 여염에서는 섣달그믐날 부엌의 조왕신이 일러주는 방향을 따라서 거울을 가지고 문밖으로 나가 거리의 첫번 말을 듣고 새해의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

한편, 거울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긴요한 생활용구이었다. 군자의 맑은 마음을 깨끗한 거울에 견준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규합총서』에 의하면 여러 가지 용도의 거울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천리경(千里鏡) · 임화경(臨畫鏡 : 한쪽 면에 무늬를 조각한 거울) · 서광경(曙光鏡 : 밤에 등잔을 비추면 그 빛이 몇 리 밖을 비추며, 겨울에 그 빛을 쬐면 온몸이 따뜻하기가 태양을 낀 듯하다 하며, 여섯 자짜리 대형도 있었다고 함.) · 현미경 · 취화경(取火鏡 : 태양을 향하여 불을 얻음.) · 취수경(取水鏡 : 달을 향하여 물을 얻음.) · 다물경(多物鏡 : 온갖 것이 많아 보임.)이 소개되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규합총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멋 5000년』(전완길, 교문사, 1980)
『한국화장문화사』(전완길, 열화당,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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