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刺文)·입묵(入墨)·자청(刺靑)이라고도 한다. 문신은 그 역사가 오래되어 서기전 12세기경 주공단(周公旦)의 두 아들이 형만(荊蠻)의 풍속을 따라 머리를 깎고 전신에 회색칠을 하는 문신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그 역사가 오래되어서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에서도 “마한의 남자들이 때때로 문신을 하였다(男子時時有文身).”라고 하였고, 변진인들도 “남녀가 왜와 같이 문신을 하였다(男女近倭亦有文身).”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이병도(李丙燾)는 문신이 자자(刺字)로 해양민족(왜인)의 고유민속이라는 전제하에서, 마한과 변진사람들이 왜의 풍속을 모방한 듯이 해석하였다. 그러나 마한인들이 장식하기를 즐겼다는 『삼국지』의 기록으로 미루어, 마한·변진인들의 문신은 자자(刺字)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장신구·색깔무늬 등의 장식이 포함된 멋내기 수단이자 주부(呪符)였고, 신분과 계급을 표시하는 방편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려 및 조선시대는 도둑의 이마에 ‘도(盜)’라는 글자를 자자하였으며, 연산군 때는 도망한 공·사 노비를 붙잡아 도노(逃奴)·도비(逃婢) 등의 글자를 얼굴에 새겨 넣었다.
문신은 이러한 형벌의 의미뿐 아니라 사랑을 확인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어 조선 말까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피부에 새겨 넣는 예가 있었다. 또,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의 수단으로 문신을 하기도 하였다.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는 전염병이 유행할 때 이마에 붉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평안북도에서는 임산부가 난산할 경우 발바닥에 天자를 입묵하였다. 제주도에서는 갓난아기가 첫 나들이를 할 때 이마와 콧등에 반드시 솥밑 검댕을 발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