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은 목욕을 청결 수단 외 미용 · 건강 · 질병 치료 혹은 의식(儀式)의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문헌에 기록된 최고(最古)의 목욕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인 알영에서 비롯된다. 즉, 박혁거세는 뭇 사람들이 놀랄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는데 동천(東泉)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다고 한다. 알영은 몸매와 얼굴이 남달리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의 벼슬과 같은 결점이 있어서 북천(北川)에 데려가 목욕시켰다. 그러자 완벽한 미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목욕을 미용 수단으로 보든지, 왕 · 왕비의 의식수단으로 보든지 간에 2,000여 년 전 우리나라에서는 목욕이 중시되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러니까 신라에서는 일찍이 목욕을 미용 혹은 청결, 의식수단으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때 목욕재계를 계율로 삼는 불교가 전래됨으로써 신라인들은 목욕을 더 자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절에는 대형 공중목욕탕이 설치되고 가정에도 목욕시설이 마련되었다.
신라의 관헌인 익선이 득오를 데려다가 일을 시킨 뒤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죽지랑이 익선을 벌주고자 하였다. 이때 익선이 도망하자 그 대신에 익선의 아들을 붙잡아 강제로 목욕시킴으로써 형벌에 대신한 일이 있다. 이것은 신라인들이 신체를 청결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인들은 신라인들보다 목욕을 더 자주 하는 동시에 사치스러운 목욕을 하였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기록된 바, 고려인들은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하였으며, 개성의 큰 내에서는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하였다고 한다. 한편, 상류 사회에서는 어린애의 피부를 희게 하기 위하여 복숭아 꽃물로 세수시키거나 목욕시켰다. 어른은 여자는 물론 남자도 난탕(蘭湯 : 난초 삶은 물)에 목욕함으로써 피부를 희고 부드럽게 하는 동시에 몸에서 향내가 나도록 하였다.
청결 관념의 확산으로 조선시대 역시 목욕이 중시되고 대중화하였다. 엄격한 도덕률 아래에서도 신라시대에 비롯된 유두(流頭) 민속을 지켜, 음력 6월 보름날이 되면 계곡과 냇가에 가서 목욕하고 물맞이를 하였다. 또한, 제례(祭禮)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해야 하는 관습과 백색피부 호상(好尙)으로 인하여 목욕이 성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가에서는 목욕시설인 정방(淨房)을 집안에 설치하였으며, 조두를 만들어 저장하고, 특히 혼례를 앞둔 규수는 살갗을 희게 하기 위한 목욕을 하였다. 난탕을 비롯하여 인삼잎을 달인 삼탕(蔘湯), 창포잎을 삶은 창포탕, 복숭아잎탕, 마늘탕, 쌀겨탕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노출을 꺼리는 생활관습으로 인하여 벌거숭이 상태로 목욕하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신체의 부분 부분을 씻어나갔다. 이 때문에 대형의 욕조가 불필요해진 대신 대형 함지박과 대야가 다수 제조되었다. 한편, 조선시대는 질병치료를 위한 온천 목욕 및 한증도 성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