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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 · 광택이 아름답고 굴절률이 크며 단단하고 희귀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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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보석은 빛깔·광택이 아름답고 굴절률이 크며 단단하고 희귀한 돌이다. 내구성이 강하고 외형과 빛깔이 아름다운데 희귀할수록 고급품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의 보석 사용은 이미 삼국시대 이전에 비롯되었다. 이후 금과 옥에 대한 선호도는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무병장수의 효능을 신봉하여 금이 가장 귀중한 보배로 간주되었다. 보석은 주술 목적 및 신분·지위의 상징, 장식적 기능, 재화적 가치 등의 이유로 애호되었다. 정성껏 가공한 보석을 통해 옛날의 생활상이나 공예 기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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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빛깔 · 광택이 아름답고 굴절률이 크며 단단하고 희귀한 돌.
내용

보옥(寶玉) · 보벽(寶璧)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한정된 의미이고 일반적으로는 희소가치가 있는 금은주옥(金銀珠玉)의 보배를 말한다. 보석의 개념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변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선사시대 사람들의 보석은 옥돌을 비롯한 화석 · 조약돌 · 조개껍데기 · 물고기와 짐승의 뼈로서 인류가 사용한 최고(最古)의 보석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유적지인 패총(貝塚)에서 목과 팔목, 손가락에 끼거나 걸 수 있게 갈고 닦은 조개껍데기 등이 출토되었다.

짐승의 뼈 · 어금니를 가공하여 목에 걸 수 있도록 줄줄이 꿴 목걸이, 여러 가지 아름다운 돌을 둥그렇게 만든 것 등도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는 금 · 은 · 구리 등의 귀금속이 발견됨으로써 보석의 개념이 광범위해진다.

따라서 지석묘 · 석상분 등에서 천하석(天河石) · 백마노(白瑪瑙) · 벽옥(碧玉) · 응회암(凝灰岩) 따위로 굽은 모양[曲玉], 둥근 모양[管玉], 공 모양[珠玉], 고리 모양[環玉]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어은동(漁隱洞)에서는 청동제의 말[馬形], 호랑이 머리 모양의 패물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석 개념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보석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즉, 비취 · 백옥 · 홍옥 · 천하석 · 공작석 · 마노 · 석웅황 · 호박 · 수정 등 옥석류, 산호 · 진주 · 대모 · 거거(硨磲) · 밀화 · 금파 등의 보패류, · · 구리 · 백통 등 금속류로 구분하였다. 이 보석들은 시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줄곧 애호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석 사용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비롯되었다. 출토된 유물 외에 문헌으로도 알 수 있는데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읍루에서 대추 크기만한 붉은 옥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마한 사람들은 둥근 옥을 좋아하여 옷에 장식하고 여럿을 꿰어 목걸이로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보석의 개념이 광범위해지는데 그 중에서 금과 옥(특히 비취)의 선호도가 높아지며, 유리가 장신구의 재료로 이용된다. 삼국시대의 장신구를 보면 관(冠)을 비롯하여 귀걸이 · 목걸이 · 가락지 · 과대(銙帶) · 요패(腰佩) · 팔찌 등 다양하다.

이들 장신구의 재료는 금 · 은을 비롯하여 비취 · 백옥 · 청옥 · 유리 · 수정 · 호박 · 마노 · 벽옥 등 옥제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재료는 금이며, 옥제품 중에서는 비취이다. 비취는 금관을 비롯하여 목걸이와 귀걸이, 요패에 많이 장식되고 있는데 대부분 굽은 모양이어서 주목을 끈다.

그리고 유리는 작은 구슬 모양이며, 잔과 병 모양도 있다. 유리가 수입된 것인지 아니면 신라에서 제조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신라에서 제조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함.), 푸른 빛깔을 착색시킨 것이 많다. 이들 보석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었으리라고 믿어지며, 보석의 가공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금과 옥을 각양각색으로 가공하여 당시 장신구의 모양이 매우 화려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상감(象嵌) 유리 옥부(玉附) 목걸이는 청색 환옥(丸玉)과 마노 환옥, 청색 관옥, 수정, 홍색 마노 곡옥 등 옥이 다양한 빛깔과 다양한 모양일 뿐 아니라 맨 아래에 달린 유리에 인물 · 새 · 구름이 장식되어 있다.

인물상은 얼굴 바탕이 백색이고 세부(細部)는 청색선으로 처리하였으며 입술에 빨간 칠을 하였다. 인물 둘레에 황색과 백색의 새가 그려지는 등 가공기술이 매우 정교하다. 금과 옥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선호도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백옥과 수정, 그리고 밀화 · 마노 · 금패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져 백옥 가락지와 비녀, 그리고 밀화 · 비취 가락지, 밀화 · 마노 · 금패 목걸이가 많이 만들어졌고 호박 · 백옥 · 마노 등은 남자들의 단추와 두식(頭飾)에도 많이 이용되었다.

보석은 내구성이 강하고, 외형과 빛깔이 아름다우며 희귀할수록 고급품으로 평가된다. 이들 보석은 채취한 상태로 간직하거나 가공한 형태 혹은 장신구의 재료로써 이용되며, 보석에 대한 인간의 선호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높은데 그 까닭은 여러 가지로 추측된다.

① 고대인들은 주술 목적으로 보석을 지녔다. 즉, 조개껍데기나 조약돌, 짐승의 뼈를 자연상태 혹은 가공하여 지님으로써 위해(危害)를 예방하거나 용맹성을 더한다고 믿은 나머지 이를 장식하였다. 옛 이집트의 여인들이 조개껍데기목걸이를 오랫동안 사용하였는데 불임(不妊)을 막기 위한 예방 목적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목적의 패용 사례가 많이 있다. 즉, 호랑이의 뼈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액귀(厄鬼)의 위해로부터 보호된다고 믿었으며, 금을 지니면 무병장수하리라고 믿었다. 또 쇠와 은으로 도끼나 고두쇠를 만들어 지니면 아들을 낳으며, 은제 원앙을 지니면 부부의 금실이 좋아진다고 믿었다.

② 신분 · 지위 · 업적의 표시수단으로서 보석을 지닌다. 고대사회의 남성은 용맹의 과시 수단으로 자신이 잡은 짐승의 이빨이나 뼈를 줄줄이 꿰어 목에 걸었다고 한다. 또한 왕만이 금관을 쓴다든지, 선비 및 관리만이 옥관자(玉貫子)를 하고, 왕비만이 금 · 은제 봉황 첩지를 장식한 예도 있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에서 보석이 신분 · 지위 · 부의 표시수단으로 사용된 예는 많이 있다.

③ 장식품으로서 보석의 기능이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우월의 욕구, 과시의 욕구를 지니고 있는바 이 욕구가 장신구로 표현된다. 귀걸이와 목걸이 · 가락지 · 팔찌 등의 장신구를 하되, 주로 내구성이 강하고, 아름다우며 희귀한 보석을 이용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보석이 장신구로서 가공되고 있다.

④ 실용적인 이유로 보석이 애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금을 먹으면 불로장수(不老長壽)한다고 믿은 나머지 금가락지 따위를 달여 마심으로써 질병치료를 기대하였다.

대모(玳瑁)는 중화제로, 호박은 지혈제로 이용한 예가 있다. 특히 옥을 대지의 정물(精物)로 간주하여 옥의 성질이 불변하듯이 지닌 사람도 무병하리라고 믿은 적이 있다.

⑤ 재화(財貨)의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내구성이 강하며 희귀한 보석은 재산가치가 높고, 투자 대상으로서도 효용가치가 높아 여느 재화보다 안전할 수 있기 때문에 선호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보석은 오늘날에 옛날보다 더 많은 재화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밖에 단순히 수집욕구의 발로로 보석이 선호되거나, 선물로 하기에 적절한 이유 때문에 선호되기도 한다. 이렇게 복합적인 이유로 인하여 보석은 동서고금 구별없이 선호되고 있다.

서구 사람들이 화려하고 투명도가 높은 보석을 좋아하는데 반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석 취향은 은은하면서도 안정감이 높은 것을 좋아한다. 이 보석 취향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선호한 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비취 : 가장 진기한 보석으로 간주되는 비취는 여느 보석에 비하여 내구성이 강하고 빛깔이 아름답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비취곡옥이 금관과 목걸이, 과대와 요대, 귀걸이 등에 장식되었는데 이 비취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것인지 아니면 수입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비취는 고려 · 조선시대에 이르러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극소수의 가락지와 노리개 · 비녀 등의 장신구로 사용되는데 조선시대의 비취는 외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② 백옥 : 빛깔이 희고 투명하며, 표면이 매끄러운 백옥은 내구성이 강하여 장식품으로서 알맞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백옥의 불변성을 인간의 절개에 비유하여 백옥가락지와 백옥비녀는 정절의 상징이 되었다. 이 밖에도 백옥은 떨잠 · 뒤꽂이, 큰 댕기의 장식, 남성의 두식 등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호박 : 호박은 식물성 화석인데, 누런 빛깔이 은은하면서도 아름다운 데다가 겨울에 피부에 닿아도 냉기가 느껴지지 않고 가벼워서 목걸이 · 뒤꽂이 · 노리개 · 단추 등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이 밖에 산호 · 진주 등도 선호도가 높은 보석이었다. 또 엄밀한 의미로는 보석은 아니지만 황금도 많이 선호되었다. 황금은 빛깔이 화려하고 태양광선과 흡사할 뿐 아니라 녹이 슬지 않는 불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금속과 합금이 쉽고, 아무리 두드려도 양이 줄지 않는 특성 때문에 삼국시대 초기부터 장신구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양질의 금이 생산되고 무병장수의 효능마저 신봉되어 금이 가장 귀중한 보배로 간주되었다. 금으로는 금관을 비롯하여 과대와 요패 · 귀걸이 · 가락지 · 팔찌 · 목걸이 · 비녀 · 동곳 따위의 장신구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석 선호는 예로부터 매우 높았다. 특히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고, 재화로서 가치가 높은 데다가 실용성을 겸비하여 수요가 많았다.

그러므로 일찍이 조정에서는 보석가공기술자를 두어 가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들 보석의 소유와 사용은 신분에 따라 제한되는 등 상류층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제한이 없어졌다. 「한양가(漢陽歌)」를 보면 도자전(刀子廛)에서 각종 비녀와 함께, 은 · 옥 · 밀화 · 금패 · 호박 · 순금 가락지가 판매되었다.

또 옥나비 · 금벌 · 산호가지 · 밀화불수가 달린 대삼작 · 소삼작 노리개, 옥장도 · 대모장도 등도 판매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의 보석을 채취한 상태로 소유하기보다는 장신구로 가공하였는데, 특히 조선시대에 성행한 노리개는 각종 보석의 집합체라고 이를 만큼 여러 가지 보석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보석은 내구성이 강하므로 1,000∼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거의 변함없이 남아 있다. 또 대부분의 보석은 아름답고 희귀하므로 정성껏 가공하였는데 보석으로써 옛날의 생활상이나 공예기술을 가늠해 볼 수 있어서 고고학자와 인류학자의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신라시대의 수정 · 비취곡옥 목걸이와 금귀걸이, 조선시대의 노리개를 통하여 당시의 문화수준이나 생활관습을 연구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전세계의 보석이 수입되고 있어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뿐만 아니라 기술의 발달로 인공적으로 보석을 합성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또한 보석의 사용범위도 확대되어 공업용으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후한서(後漢書)』
『삼국사기』
『삼국유사』
『한양가(漢陽歌)』
『한국장신구미술연구』(황호근, 일지사, 1976)
『한국화장문화사』(전완길, 열화당,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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