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개는 농사에서 재배하는 작물의 성장을 도와주기 위해 농경지의 자연적 물 순환을 인위적으로 보완하거나 조절하는 행위이다. 관개는 농사의 방식에 따라 구분된다. 즉, 농경지의 토양과 재배작물의 특성 차이에 따라 각각 다른 관개 방식이 필요하다. 벼를 재배하는 논농사에서는 인위적인 관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밭농사에서는 논농사에 비해 인공 관개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 그래서 벼를 재배하는 논농사와 관련되며, 논농사에 필요한 수리 시설의 축조 및 운영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유사한 개념으로 수리, 농업수리, 수리 관개 등이 사용된다.
관개(灌漑)의 역사는 곧 벼재배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벼재배에 필요한 물을 적시 적소에 공급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관개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 벼재배 방식은 대체로 평탄하고 습지인 델타 지역 혹은 소택지(沼澤地)를 이용하였으며, 별반 인공의 관개를 가하지 않고 이루어졌다.
고대의 관개 양상을 논 주1를 통해 보면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논 유구는 곡지(谷地)나 하천 범람원에 위치하며, 곡지에 형성된 것은 계단식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계단식 논이라 하더라도 오늘날의 계단식 논과는 다른 형태이다. 돌출 논둑이 거의 없으며, 논의 폭이 좁고 길어서 전체적으로 호상(弧狀) 내지는 동심원상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고대 논 이용 방식은 물을 가두어 벼를 재배하는 오늘날과 차이가 있음이 확인된다.
대신 돌출형의 논둑이 있는 경우는 주로 하천 범람원 지역이 되며, 이들 지역에서는 물을 관개하여 벼를 경작한 것으로 보인다. 논둑이 없는 논의 경우는 오늘날처럼 물을 가두는 것이 아닌 건답(乾畓) 형태의 재배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논과 밭을 일정 기간 바꾸어서 경작하는 윤답식의 토지이용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경우는 물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아 지리적 조건을 이용한 자연 강우에 의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은 고대의 벼 품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대 유적에서 출토된 벼의 낟알 형태를 보면, 주2와 주3의 중간 형질을 가진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벼 품종은 근현대까지도 많았는데, 파종 시기와 생육 초기에는 건조한 밭 상태에서 재배하다가 이후 여름철 우기가 시작되면 물을 관개하여 수도로 키우던 전래의 건경법(乾耕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벼재배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공 관개도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관개의 시작은 고대 삼국시대 무렵으로 본다. 이 시기 인공 저수지의 축조를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경우 330년(흘해이사금 21)에 벽골지(碧骨池)를 처음 열었다는 기록이 있고, 429년(눌지마립간 13)에 시제(矢堤)를 처음 쌓았음을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천 청제비(菁堤碑)는 법흥왕(法興王) 때 축조되고 원성왕(元聖王) 때 중수되었다.
백제는 보다 이른 시기에 벼농사에 관해 구체적인 언급이 『백제본기(百濟本紀)』에 보이는데, 서기 33년(다루왕 6) 2월에 “영을 내려 나라 남쪽의 주(州) · 군(郡)에 처음으로 남택(南澤)에서 논[도전(稻田)]을 만들게 하였다[명국남주군(命國南州郡) 시작도전어남택(始作稻田於南澤)]”라는 기사와 242년(고이왕 9) 봄 2월에 “나라 사람들에게 명하여 남택에서 논[도전]을 만들게 하였다[명국인(命國人) 개도전어남택(開稻田於南澤)]”라는 기사를 통해 수도 웅진의 남쪽 남택에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인공 저수지 이외에도 산간 계곡수를 이용한 소규모 보(洑)도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기록상에는 없으며,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논밭 유구를 통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더 많은 저수지의 축조 및 수축에 관한 역사적 기록들이 확인된다. 벽골제(碧骨堤)의 증축과 더불어 황해도 연안의 남대지(南大池), 충청도 홍주의 합덕제(合德堤), 상주 공검지(恭儉池), 밀양 수산제(守山堤), 제천 의림지(義林池) 등이 그 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특징은 관개시설을 축조한 특정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고려 후기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진압하고 몽골군과 함께 일본 원정을 지휘한 김방경(金方慶)이 1248년(고종 35) 몽골 침입 때 서북면(西北面)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평안도 정주(定州)의 위도(葦島)로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제언(堤堰)을 쌓아 농사를 짓게 하였다는 내용이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전하며, 몽골군과 함께 일본 원정에 나섰을 때는 밀양에 수산제를 수축(修築)하여 둔전(屯田)을 개간하여 군수(軍需)에 대비하였다는 사실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전한다. 그리고 상주의 사록(司錄) 최정분(崔正份)은 1195년(명종 25) 옛터를 따라 공검지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이 역시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전한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 관개시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뿐만 아니라 「묘지(墓誌)」 같은 금석문에서도 확인되는데, 관개시설의 구체적인 용도가 고대보다는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저수지 이외에 강화도를 비롯한 해안 도서 지역의 방조(防潮) 시설인 언(堰), 그리고 내륙 지역에서 인수(引水) 시설인 거(渠) 등의 축조도 많이 이루어져, 관개용 수리 시설의 종류나 쓰임이 훨씬 다양해지고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농업기술은 휴한법(休閑法)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었으므로 관개시설의 규모나 기능 또한 한계가 있었다.
관개 기술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농업기술과 함께 크게 발전하였다. 농업기술이 휴한 단계에서 연작상경(連作常耕)의 단계로 발전하였고, 농본주의를 중심으로 한 권농책(勸農策)이 관개 수리 시설에 대한 필요성을 높였다. 관련 사료들은 보보다는 제언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는데, 그것은 제언 축조 자체가 큰 역사(役事)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제언에 관한 기록으로는 대표적으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들 수 있는데,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수도 재배 지역의 유명한 제언들이 제시되어 있다.
태조는 제언 수축을 권농책의 으뜸으로 꼽았으며 권농관(勸農官)으로 하여금 정기적인 제언 수축 및 물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태종은 고려 말 이후 방치되었던 벽골제를 대대적인 인력을 동원해 중수하였고, 세종은 즉위하자 곧 고부(古阜)의 눌제(訥堤)를 수축하였다. 그리고 각 주 · 군의 제언 수축 수를 주4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1429년(세종 11) 『농사직설(農事直說)』을 간행하였다.
문종 때는 수리 정책의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하천 중심의 천방(川防) 개발이 바로 그것이다. 제언 중심에서 천방 개발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제언은 주로 산곡에 축조하여 그 아래의 몽리답(蒙利畓)에 관개하였는데, 제언 축조로 인한 개발이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판단하여 개발의 여지가 큰 하천 유역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로써 본격적인 하천 지역 개발이 시작되었다.
성종은 1474년(성종 5) 합덕제를 수축하였으며, 1486년(성종 17)에는 황해도 재령군에서 천방 사업을 크게 일으켜서 5,000~6,000여 석(石)의 토지를 얻었다. 연산군 대에 와서는 폭정으로 인해 앞서 수축한 관개시설마저 파괴되고 합덕제가 공주의 궁장토(宮莊土)로 사유화되는 등의 후퇴가 있었다. 이후 중종은 제언 수축을 독려하는 동시에 경기도 광주(廣州)의 한강 유역에 승려를 동원하여 축방 공사를 크게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토는 피폐화되고 농민은 유민화되어 많은 관개시설이 폐기되거나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래서 제언을 담당하였던 제언사(堤堰司)도 일시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1662년(현종 3) 복설하여 「진휼청제언사목(賑恤廳堤堰事目)」을 마련하였다. 이는 피폐해진 국토를 복구하기 위한 진휼책의 하나였으며,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제정한 최초의 규정으로 하천 유역의 개발이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정조 대에 와서 수리 정책은 다시 제언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1778년(정조 2) 반포된 「제언절목(堤堰節目)」에는 제언에 관한 것이 9개 조목, 천방에 관한 것이 1개 조목으로 제언이 압도적이다. 「제언절목」의 반포는 제언 내 주5 금지 및 옛 제언 복구가 본래의 취지였다. 모경은 제언을 헐어 저수된 물을 빼버린 후 제내(堤內) 지역을 경작지로 삼는 것으로 모경 금지는 전란 피해 복구 차원에서 대단히 긴요한 조처였다.
조선시대 관개는 시기적으로 크게 3단계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문종 이전 산간 계류의 계곡수를 이용하는 제언과 보 중심의 수리 정책, 둘째는 문종에서 정조 이전 시기까지의 하천수를 주 수원으로 이용하는 천방 중심의 수리 정책, 셋째는 정조 이후 다시 제언 중심으로 바뀐 수리 정책이다. 첫째와 셋째는 모두 제언이 중심이었다는 데서 유사하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즉, 전자는 수전에서 이앙법의 보급이 미미하던 시기이고, 특히 직파법이 중심 농법이었기 때문에 수원이 풍부한 특정 지역에 한정되었다. 후자는 이앙법이 주6 지역까지 보급되는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수원과 수리 시설의 규모, 그리고 관개 방식 등이 매우 다양화된 시기이다.
그 결과 관개시설은 그 숫자에서부터 많이 늘어나는데, 예종 때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의 제언 수는 769개에 지나지 않던 것이, 18세기 중반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제언 수는 3,171개이다. 이중 경상도가 1,242개로 가장 많으며, 그다음은 전라도 857개, 충청도 542개 순이다. 그리고 19세기 초반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編)에는 전국의 제언[3,685개]과 보[2,265개]의 숫자가 지역별로 제시되어 있다. 경상도 제언 1,765개 · 보 1,339개, 전라도 제언 946개 · 보 164개, 충청도 제언 525개 · 보 497개이다. 비록 오늘날 통계처럼 정확하지 않음을 고려하더라도 관개의 발전이 일단 수치상으로 크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관개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산미증식계획으로 수리조합의 발족과 함께 근대적 수리 사업이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수리계 조직이 수리조합 체계로 바뀌었다. 1908년에 설립된 옥구서부수리조합을 시작으로 각지에 수리조합이 창설되었고, 제언 · 보 등의 수축 및 미개간지 · 간석지의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관개시설 축조에서 시멘트를 사용하는 등의 신기술이 도입되었다. 서구의 토목 기술을 이용한 결과 관개시설의 규모도 커지고 견고해졌으며, 이제까지 개발하지 못한 4대강 유역까지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등의 어려움 속에서 주춤하던 관개사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1961년 「수리조합법」이 바뀌고, 「토지개량사업법」이 새로 공포되면서 토지개량조합이 만들어졌다. 이후 농지개량조합, 농업기반공사, 한국농촌공사 등으로 변화를 거듭하여 2000년 한국농어촌공사가 되었다. 관개시설은 더욱 다양화되고 현대화되었으며 그 규모도 커졌다. 섬진강댐을 비롯하여 다목적댐이 2013년 25개에 이르고, 대규모 관개용수 댐은 전국에 1,000여 개가 넘는다. 이 밖에도 양수장, 관정 등 전통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관개시설이 축조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수리안전답률은 1972년 62%, 1982년 70%, 2021년 83.1%가 되었다. 그리고 2000년에는 농민들이 누대로 지불해 오던 수세(水稅)가 완전히 폐지되었고, 관개시설은 사회간접자본이 되어 축조 및 관리를 국가가 대부분 책임지는 시대가 되었다.
농사에서 기후 상태와 토양 그리고 작물의 성장 상태에 맞추어 시의적절한 물대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관개시설이 필요하다. 관개시설은 자연지리 조건이나 사회의 기술 발전 정도 그리고 농사의 종류나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관개라고 하면 대체로 물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벼농사를 전제로 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관개시설이라고 할 때 벼농사를 전제로 한 수리 시설을 가리킨다. 관개시설 중 역사적으로 널리 사용되어 온 것은 보와 저수지이다.
보는 하천이나 개울을 흐르는 물을 막아서 관개용수로 이용하는 것이다. 둑을 쌓아 물의 자연적인 흐름을 막은 다음 도랑을 내어 유도하여 논으로 관개하는 방식이다. 보의 역사는 적어도 삼국시대까지 소급된다. ‘보(洑)’라는 한자는 중국에서 사용하지 않는 우리 고유의 한자로 536년(법흥왕 23)에 세워진 영천 청제비에 처음 등장한다. 보는 물길을 인위적으로 바꾸어 관개하는 것이 기본 원리인데, 산이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용한 관개시설이다. 물길을 내어주면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자연스럽게 흘러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관개를 위한 도구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보가 관개의 중심이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보는 수원의 규모에 따라 구분된다. 수원이 작은 개울이나 도랑 같은 곳에서는 작은 계류보(溪流洑)를, 그리고 하천과 같은 수원의 규모가 큰 곳에서는 거대한 하천보(河川洑)를 축조하여 사용하였다. 역사를 소급할수록 계류보가 많았고, 현대에 가까울수록 하천보가 많다. 관개 기술이 발달할수록 그리고 농업이 발달할수록 작은 계류보보다는 수원이 풍부한 하천수를 이용하였다. 큰 하천보의 경우 하천 혹은 내를 막았다는 의미에서 ‘천방(川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작은 계류보의 경우는 전통사회에서는 상시 시설이 아니라 농사철 한시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보는 외부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아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며 몽리인들만이 서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통사회에서 축조한 보는 주변 인근에서 재료를 조달하였으므로 주로 흙보 혹은 돌보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장마가 지면 보가 떠내려가고 허물어지기 일쑤였고, 관개가 필요할 때는 부역을 통해 다시 축조하거나 보완하여야만 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근현대에 들어와 바뀌었으며, 흙보나 돌보는 시멘트보로 그리고 임시 시설에서 상시 시설로 바뀌었다. 보는 조선 후기 이앙법이 보급되면서 축조 및 이용이 더욱 확대되었다. 보는 흐르는 물이 주변이 있으면 막아서 쉽게 관개수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울이나 하천의 물길을 바꾸어 관개하는 것이 보인 데 비하여, 저수지는 물을 가두었다가 필요한 시기에 관개하는 수리 시설이다. 달리 제(堤) 혹은 지(池) 등으로도 부르는데 순우리말은 ‘못’이다. 이 외에도 고문헌에는 피(陂), 당(塘), 택(澤), 피당(陂塘), 피택(陂澤), 피제(陂堤), 지당(池塘), 통(筒) 등 매우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같은 저수지라고 하더라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저수지의 수원은 솟는 물, 작은 개울, 큰 하천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들 저수지는 기후학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와 같이 여름철에 집중 강우가 이루어지는 몬순(monsoon) 기후에 적합한 관개시설이다. 강우량이 많은 여름철에 주로 취수 저장하고, 가뭄이 심한 봄철 모내기 때 끌어다가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저수지는 물을 가두고 저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튼튼한 둑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제라는 명칭은 물을 막거나 저장한 시설이라는 의미가 강하고, 지는 가둬놓은 물에 방점을 둔 것이다. 제나 지라는 명칭 대신에 ‘방죽’이나 ‘둑방’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방죽’은 한자어인 ‘방축(防築)’이 음운변화한 것이다. 방죽이나 둑방 모두 둑에 중점을 둔 용어이다.
저수지는 대체로 위치한 곳의 지리적 조건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산곡형과 평야형 그리고 구릉형이 그것이다. 산곡형은 계곡의 입구를 막아 저수지를 축조한 것인데, 대체로 계곡이 급격히 좁아지는 곳을 막아 둑을 설치한다. 지형의 형국이 소쿠리형 같은 곳의 입구에 저수지 둑을 축조한 예들이 많다. 이런 경우 저수를 쉽게 할 수 있고, 축조에 필요한 재료와 노동력 등의 투입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우리나라의 저수지는 대개 산곡형이다.
이에 비해 평야형은 개활한 평야 지역에 있는 것으로 제방의 둘레에서 둑이 차지하는 비율이 산곡형에 비해 현저하게 높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저수지의 축조 자체만 고려하면 산곡형에 비해 비효율적이다. 저수를 위한 둑을 쌓아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리 시설의 축조로 인한 이익 즉 주7가 더 크다는 점을 고려하여 대규모 재료와 인력 동원의 부담을 감수하면서 축조하게 된다.
구릉형 저수지는 산곡형에 포함될 수도 있으나 높은 산이 멀리 위치하고 해발 100~200m 정도의 구릉 지역이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구릉이 끝나는 지점 혹은 구릉지 안의 저수 조건이 유리한 지점에 둑을 축조하는 특징이 있다. 대표적인 구릉 지역으로는 대구, 경산, 하양, 영천 등지의 금호강 유역, 이천과 여주 주변 지역, 논산과 광주 주변의 평지 지역 등을 들 수 있다. 구릉은 공간적으로 높은 산과 논 사이의 중간 지대가 되며, 얕은 산이거나 밭농사 지대가 된다. 산에서 발원한 작은 시내나 개울이 흐르는 구릉 사이를 막아 저수지를 축조하여 그 아래에 있는 들에 관개하는 방식이다.
보나 저수지가 기능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관개시설들과 몽리답을 연결하는 인수(引水) 시설이 필요하다. 관개시설과 몽리답이 바로 연결되어 있으면 인수 시설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대개는 일정 거리를 떨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멀게는 10리 이상 떨어져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고문헌에서 거(渠), 구(溝), 양(梁) 등으로 표기한 것이 인수 시설인데, 민간에서는 간략히 봇도랑으로 불린다. 이 인수 시설은 간선(幹線)과 지선(支線)으로 나누어져 각 몽리답에 물을 공급하게 된다.
넓은 의미에서 저수지의 범주에 포함할 수도 있으나 둠벙, 둔벙, 늪, 포강(蒲江), 웅덩이, 못, 포항, 샘, 물광 등으로 부르는 작은 규모의 소류지(沼溜地)도 매우 유용한 관개시설이다. 이들은 인공적으로 축조한 것도 있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도 있다. 그리고 샘처럼 솟는 물을 저장하는 것, 흐르는 물을 저장하는 것, 혹은 빗물을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것 등 매우 다양하다. 어떤 물이든 모을 수만 있다면 수원의 종류에 상관없이 모아 사용하는 것이다. 이들 소류지는 대체로 물을 저수하는 공간이 지면보다 낮은 곳에 있다. 그래서 이들 관개시설을 이용할 때는 두레, 용두레, 맞두레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물을 푸는 경우가 많다. 몽리답보다 관개시설이 높은 위치에 있는 경우는 둑을 헐어서 물을 대기도 한다.
이들은 저수지나 보 등의 관개시설을 갖추지 못한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며, 수근이 있는 논 가장자리나 근처에 땅을 파서 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이들은 명칭이 서로 다르지만 물을 저장하는 소규모 시설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지역의 수리 환경조건에 따라 축조 방식이나 축조 위치, 사용 방식 등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유사성이 크다. 이러한 관개시설은 규모가 작아서 기존의 수리사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대체 수원이 없을 때, 축조가 쉽고 규모가 크지 않아 관리가 용이한 이들 소류지가 농민 입장에서는 대단히 소중한 관개 수원인 경우가 많다.
이외의 관개시설로는 서해안 간척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언(堰), 그리고 한반도 서부 지역 저지대에 주로 분포하는 저수답(貯水畓), 강화도 간척 지역의 물광[水庫]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관개시설의 범주를 좀 더 확장한다면, 내륙이나 도서 지역에 분포하는 수많은 천수답인 수리불안전답을 들 수 있다. 이들 역시 웅덩이나 둠벙처럼 기존 수리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것들이다. 이들은 보편적인 관개시설에 속하지는 않지만 특정 지역에서는 수도 재배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 되기도 하였다. 언의 축조는 염해의 피해를 막아내면서 수도작을 행하던 방법이며, 저수답이나 물광은 수원이 부족한 지역에서 물을 저수하여 관개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대안이었다. 천수답 또한 벼농사를 하기에 매우 불리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저수답과 유사하게 논 자체에 물을 저장하여 벼를 재배하였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개시설들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형태 중심의 분류이며, 실제 농업 현장에서는 관개 방식이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띤다. 단일의 관개시설로 이용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대체로 저수지와 거 혹은 보와 거가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곳에 따라 보와 둠벙이 조합을 이루거나, 저수지와 보 그리고 거가 결합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관개시설을 어떻게 운영하고 관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이전의 상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간략히 수축에 관한 사항만 기록에 전할 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경우는 초기부터 수리 정책을 수립하여 그에 입각한 운영과 관리를 비교적 체계적으로 시행하였다.
태조는 등극하자 곧 문무백관의 관제를 정비하는데, 이때 사재감(司宰監)을 두어 어량(漁梁)과 산택(山澤)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 1년 7월 기사에서 보인다. 이에는 판사(判事) 두 명 정3품, 감(監) 두 명 종3품, 소감(少監) 두 명 종4품, 주부(注簿) 두 명, 겸주부(兼注簿) 한 명 종6품, 직장(直長) 두 명 종7품의 직제를 두었다. 그러다가 태종 5년 3월에는 공조(工曹) 소속의 산택사(山澤司)를 두어 산택(山澤) · 진량(津梁) · 조운(漕運) · 연애(碾磑) · 둔전(屯田) · 어염(魚鹽) 등의 일을 정랑(正郞) 한 명, 좌랑(佐郞) 한 명이 관장하게 하였다.
세종은 즉위년 10월에 여러 도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각 주 · 군의 제언을 살펴서 출척(黜陟)의 근거로 삼았으며, 고을마다 제언의 숫자와 주8에 관한 장부 두 부를 작성하여 한 부는 호조(戶曹)에, 한 부는 궁중에 수장하여 이것을 빙고(憑考) 삼아 수보(修補)하도록 하였으며, 농사를 시찰하고 전곡(田穀)의 손실(損實)을 감정(鑑定)하던 손실경차관(損實敬差官)이 제언의 업무를 겸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관개시설의 사무는 호조에서 담당하였다.
수리행정(水利行政)을 관장한 대표적인 관서(官署)인 제언사(堤堰司)는 제언제조(堤堰提調)를 택정(擇定)하였던 세조 때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1459년(세조 5) 8월 제언제조의 단자(單子)에 따라 제언의 물통[水桶]을 대제(大堤)에는 세 개, 중제(中堤)에는 두 개, 소제(小堤)에는 한 개를 설치하고, 제언의 좌우(左右) 수도(水道)에는 돌을 깔아서 터지고 무너지지 않도록 하며, 이에 대해서는 제언별감(堤堰別監)을 보내어 적간(摘姦)하라고 한 왕명이 그 근거이다. 임진왜란 이후 제언사는 일시 폐지되었다가 1662년(현종 3)에 복설되며, 1683년(숙종 9) 제언 사무는 비변사(備邊司)에서 담당하게 되고, 1865년(고종 2)에는 다시 의정부(議政府)에 속하는 등의 많은 변화를 겪는다.
한편 지방은 관찰사(觀察使)가 군현 단위의 고을 수령을 관리 감독하여 관개시설을 운영 관리하고 그 결과를 중앙의 제언사에 보고하는 체계였다. 토호(土豪)나 간민(奸民)이 제언의 둑을 함부로 헐고 이익을 취하는 경우나 땅이 비옥한 제내(堤內)에 모경(冒耕)을 하는 등의 사실이 발견되면 해당 읍에서는 순영(巡營)에 보고해서 먼저 형추(刑推)하고, 추후에 중앙의 제언사에 전보(轉報)하여 단죄하였다. 만일 해당 읍에서 그런 사실을 적발하지 않고 두었다가 후에 드러나면 수령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다스렸고, 해당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는 영문(營門)에 잡아다가 형추하여 주9하였다.
수리 시설을 수축할 때 보의 경우는 몽리 지역 농민들에게 알리고, 수령은 직접 자세히 조사하여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조정의 담당 부서에도 알리도록 하였으며, 축조에 필요한 노동력은 해당 지방 농민들의 부역으로 하되 그것이 부족하면 해당 읍의 연군(烟軍)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마저 부족하면 인근의 연군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언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였는데, 작은 것은 몽리 지역의 농민들이나 부근의 군정으로 해결하고, 규모가 커서 한 읍의 역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경우 순영에 보고하여 이웃 군의 도움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축을 마친 후에는 동원한 군정의 숫자와 공사 경위들을 낱낱이 순영에 보고하고 조정에 알리도록 하였다.
수리 시설의 수축에 필요한 인력은 지역의 농민들과 군정의 동원이 기본이었지만 때로는 승려가 동원되기도 하였다. 동원된 승려들에게 도첩(度牒)이라는 신분증을 발급하여 그 유무를 따져 동원일을 정하였다. 그리고 수리 시설을 수축하는 데는 많은 목재와 돌이 필요한데, 이를 조달하는 방법으로 특별히 방시(坊市)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 방시 개설을 감사에게 보고하여 장꾼들이 이웃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금지하고 시장에 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목석(木石)을 갖고 오도록 하였다.
수리 시설의 수축 공사에 동원된 가난한 사람에게는 관가에서 식량을 나누어주도록 하여 진휼 정책을 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리 시설의 수축 공사로 인해 전답에 손해가 있는 경우는 몽리를 비교하여 땅 주인에게 계산하여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진휼과 배상이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수리 시설의 운영과 관리의 최말단은 수리 시설이 위치한 지방의 군현이다. 지방의 수리 시설은 수령의 지휘를 받는 육방 관속 중에서 호방(戶房)이 담당하였다. 지역의 수리 시설 종류와 몽리답 면적을 수시로 보고하고, 수리 시설을 관리하는 감관(監官)과 감고(監考), 그 외 각 면리(面里)의 권농관(勸農官) 임명 등이 모두 호방의 직무였다.
수리 시설을 직접 사용하는 농민들은 몽리자 중심의 수리 조직을 결성하고 수리에 밝은 사람을 도감(都監)으로 뽑아 운영과 유지관리를 체계적으로 하였다. 제언의 경우 못도감, 보의 경우 봇도감 체제가 대표적이다. 이들 수리 조직은 일제강점기 이후 지역 수리계(水利契)로 대체 혹은 흡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도감을 중심으로 한 수리 조직은 수리 시설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도록 연중 관리를 하였다. 총회를 통해 계칙 등의 운영 원리를 마련하고, 그에 근거하여 수리 시설의 정기적인 점검 및 물 배분의 효율화를 기하였다. 제언의 경우, 정기적인 준설 작업과 더불어 수원 자체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한 예로 청송 주산지(注山池)의 경우 한 해 첫물을 내리기 전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낸 후 수원을 제대로 확보할 수 있게 하려고 사방공사(沙防工事)를 한다거나 못둑을 보강하는 등의 역사(役事)를 오늘날까지도 지속하고 있다.
수리 시설은 농사철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공간이나 시설로 이용함으로써 일상적 차원에서 관리하기도 하였다. 저수지의 경우 제방의 도로화, 연 심기와 물고기 기르기, 누정 건축 등이 그 예다. 제방의 도로화는 못둑을 길로 이용함으로써 제방을 튼튼하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연 심기나 물고기 기르기는 경제성을 띤 실용적인 관리 방법이다. 그리고 저수지 주변에 누정과 같은 문화시설을 설치하는 것은 수변공간이 갖는 경관을 잘 활용하여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자연스럽게 관리하는 방법이다.
보는 전통적으로 보막이를 흙, 나무, 돌 등으로 축조하였기 때문에 여름철 장마에 일부 허물어지거나 큰비에 쓸려 내려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보는 거의 해마다 농사철이 되기 전에 보수를 하거나 때로는 중수에 버금가는 수준의 공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통적으로 몽리민들은 봇도감의 지휘 아래 1년에 2회[모내기 전과 여름 장마 후] 정도의 부역을 통해 보수 및 관리 활동에 참여하였다. 몽리민들의 보 보수 작업은 ‘보매기’라고 하는데, 보매기에 참여하는 인원은 몽리면적에 비례하였다. 몽리면적이 넓을수록 물 사용량도 많아지므로 보매기 작업의 의무도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보 역시 저수지와 마찬가지로 농사철만 관리하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보수로의 둑은 사람이 다니는 길로 이용하고, 농한기 봇물을 물레방아용으로 전용하며, 봇도랑을 빨래터로 이용하거나, 물놀이나 목욕터로 이용하면서 일상적으로 관리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간선수로(幹線水路)의 경우, 다른 수로보다 둑이 넓고 높아 길로 이용하기 좋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보수로 둑이 튼튼해지고 상시 관리가 이루어졌다.
물은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벼농사를 짓는 데는 더없이 중요한 자원이다. 그래서 농사철이 시작되어 수리 시설의 수문을 처음 열 때는 몽리민들이 모여 풍농과 안전 영농을 비는 의례를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수리 시설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이어져 오고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 동진지사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낙양동산에서 매년 4월 1일 개최하는 ‘백파(百波) 통수식(通水式)’이나 청송 주산지의 ‘못맥이’ 행사는 그 대표적인 예다.
수리 시설의 축조는 대체로 지역의 중요한 역사가 된다. 수리 시설의 축조로 인해 토지의 개발이 본격화되고 사회 · 경제적인 변화가 크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수리 시설의 축조에 관한 사실을 지역별로 기록한 역사가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이러한 역사가 전설로 전해지는 경우가 흔하다. 전설의 형태나 내용은 수리 시설에 따라 다른데, 보에 관한 것과 저수지에 관한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그리고 그중에서 보에 관한 전설이 대종을 이룬다. 이는 전통사회 수리 시설이 보 중심이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전설의 서사구조는 도깨비, 현몽, 하늘의 도움, 기이한 현상 등과 같은 초월적 존재의 도움으로 수리 시설의 축조를 어렵게 완성하였다는 것이 기본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