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지(臥龍池)라고도 한다. 『문헌비고』에 남대지의 둘레가 8㎞(20리 102보)로 되어 있으나 제방의 길이와 저수 면적·몽리(蒙利:저수지나 보 등 수리시설의 혜택을 받는 것)면적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남대지가 ‘국중대제언(國中大堤堰)’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연백평야를 관개하던 큰 저수지였을 것이다.
축조연대는 『문헌비고』에 “고려 문종 때 저수지 바닥을 일부 개답하여 흥왕사에 급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 이전에 축조된 것은 틀림없으나, 언제 축조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역사적 저수지가 그렇듯이 남대지도 몽리민의 공유였으나 한때 궁방(宮房)의 소유로 이관된 적이 있다. 즉, 세조 때에는 영응대군(永膺大君)염(琰)과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권람(權擥)에게 관리권이 넘어간 적이 있고, 또 연산군 때에는 연산군의 총희 장녹수(張綠水)에게 일시 급사된 적이 있다.
1652년(효종 3) 정유성(鄭維城)이 남대지가 궁방 소유로 된 것이 한심스럽다고 한 기록이나 영조 때 육상궁(毓祥宮:역대 왕 가운데 正宮 출신이 아닌 군주의 私親을 모신 사당)에 절수(折受)되려다 중단된 사실들이 그러한 예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제방 안의 개답이 용이하리만큼 수심이 낮았거나, 갈수기에 바닥이 마르고 갈라져 용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어 와룡지라고 불릴 만큼 조선 말기에는 남대지가 많이 궤패(潰敗:무너져 패하는 것)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에 “남대지는 이제 모두 막혔다.”는 기록과 황현(黃玹)의 『매천야록』 광무 5년조에 “가뭄이 탈 때는 남대지 바닥에 먼지가 날리고 퍼런 음화가 수십 일간 타고 있었다.”는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민족항일기에는 연백수리조합에 흡수되어 폐지되었으나, 광복 후 이북으로 편입되어 옛터의 관리상태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