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양지(景陽池)의 축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 온다. 고대 축조설은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조선 전기설은 세종 대에 김방(金倣)이 수축하였다는 내용으로 그 시기는 세종 대(1418~1450) 또는 1440년(세종 22)이나 1441년(세종 23)이다. 김방은 광주목(光州牧)의 실존 인물로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등을 지냈고 토목공사를 잘하여 벽골제(碧骨堤)를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경양지 수축도 연계한 것 같다. 그런데 김방이 경양지를 수축하였다는 기록은 관찬 자료나 지지류, 개인의 시문 따위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913년 『수리에 관한 관습』이나 1933년의 『광주군사』에 세종 대 김방 축조설이 나오는데 구전 내용을 기록한 것 같다. 조선 전기 세종 대 수축설은 지역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근거가 될 만한 유적이나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또 다른 조선 전기설은 임진왜란 이전에 수축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경양역 주1 국보(國保)의 청에 따라 지은 시에 연못이 언급된 점, 1604년(선조 37) 계음(溪陰) 조팽년(趙彭年: 15491612)의 시에 경양제(景陽堤)가 언급된 점 등으로 보아서 임진왜란 전쟁기 이전에 수축한 것으로 보고 있다. 1624년(인조 2)의 광주목사 죽음(竹陰)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이나 장성부사 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 1568?)의 시에서도 경양방축(景陽防築), 경양언(景陽堰) 표기가 있어 이 시기에 실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양지는 수리 시설이지만 둑방길에 나무가 우거져 있어 지역민들이 노닐며 구경하는 곳이 되어 많은 시문이 전한다. 1937년 택지조성을 위해 15만 515㎡가 매립되었다. 지역민의 위락 공간으로도 활용되었으며 겨울철이면 스케이트장으로도 썼다. 1968년에는 나머지도 매립하고 시가지가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9)에 둘레 주2, 수심 1자 4 치로 나오며 1872년(고종 9) 광주목 지도에서는 장타원형 형태이다. 1918년 지형도에는 부채꼴 형태이다. 1910년대 지적원도에서 표기한 면적은 21만 6257㎡이었다.
조선시대 광주목 42개 제언(堤堰) 가운데 가장 큰 수리 시설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경양지(慶陽池), 금교방축(金橋防築), 금교제(金橋堤), 경호(鏡湖), 서방지(瑞坊池), 영지(影池) 등 10여 개의 명칭이 있고 여러 문인의 시문 등에 나와 광주의 문화경관 명소로서도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