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의 황등제(黃登堤),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와 더불어 호남 삼호(三湖)의 하나였다. 1873년(고종 10)에 폐지되었으나 당시 제방의 길이는 1.5㎞, 둘레는 16㎞였다. 1916년 눌제의 위치에서 4㎞ 상류에 흥덕제(興德堤)를 축조하였는데, 흥덕제의 유역이 4,420㏊, 저수량이 7,791㎦, 관개면적이 6,113㏊인 것을 보면 폐쇄되기 전 눌제의 규모가 얼마나 방대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눌제의 기원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정읍군사(井邑郡史)』에는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으며, 『태종실록』에 의하면 동 · 중 · 서에 3개의 큰 수문이 있었다고 한다.
1419년(세종 1) 고부군수의 건의와 전라감사의 계청(啓請:왕에게 아뢰어 청하는 것)으로 민정(民丁) 1만 1,580인을 두 달 동안 동원하여 수축공사를 마쳤다. 그러나 이듬해 8월의 대홍수로 벽골제와 더불어 제방이 무너져 논 600여 결(結)이 유실, 매몰되어 관리에 부심하던 전라감사 장윤화(張允和)는 눌제를 폐쇄할 것을 건의한 바 있다.
『증보동국여지승람』에는 1530년(중종 25)눌제가 폐쇄되어 논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폐쇄되었다가 조선 중기에 다시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873년에 폐쇄한 것은 두 번째가 되며, 그 뒤 고부천에 큰 보(洑)를 막아 농사를 지었는데, 게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이 보를 ‘게보[蟹洑]’라고 하였다. 이 보도 매년 홍수 피해가 심하여 1873년 당시의 군수 박규동(朴奎東)이 보를 없애 버리자 서부의 군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는 영세불망비를 제방 위에 세워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눌제의 옛 제방은 현재 관청리와 신흥리를 잇는 지방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 저수지는 우리나라 도작문화(稻作文化)의 발전과 더불어 호남지방의 식량생산이나 농업경제상 중요한 구실을 한 수리시설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