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수산제는 삼한시대에 벼농사를 위해 축조된 관개용 저수지로,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인이 수리시설을 하기 전까지 황토 흙으로 된 제방이 수산리에서 양동리에 걸쳐 약 1,040m가 남아 있었으며, 전체 규모는 약 4,468㎡였다.
제방은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龍津江)이 범람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며, 수문은 배수를 위하여 수산리 산 524-1 부근 강바닥의 암반을 뚫어 만든 것으로 그 유구(遺構)가 일부 남아 있다. 발굴된 수문은 폭 1.5m, 높이 1.8m 가량이다. 나무로 만든 수문의 갑문(閘門)은 완전히 소멸되어 그 구조와 형상을 알 수 없다.
수산제의 위치는 현재의 하남읍 수산리 · 귀명리 지역과 초동면의 검암리 · 금포리에 걸쳐 있었다. 수산제의 축조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밀주구지(密州舊誌)』에 고려 충렬왕 때의 장군인 김방경(金方慶)이 긴 제방을 증축하고 일본 정벌에 필요한 군량을 생산하려 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세종실록지리지』에 수산제의 길이가 728보(步)이며, 그때까지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내천(內川)이 남아 있었으나 제방은 수축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에 이미 많이 황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채 방치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수산제와 주변 황무지를 논으로 개간하면서 저수지는 논으로 변하여 옛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삼한시대 저수지로 추정되는 수산제는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제천의 의림지(義林池)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저수지의 하나로서, 고대 관개 수리시설과 농업시설의 발달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