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평야를 관개하던 젖줄이었으나 1964년 예당지(禮唐池)가 준공됨에 따라 관개용수량이 충분하여 이 해에 합덕지는 폐지하고 현재는 농경지로 개답하였다. 폐지되기 전 제방의 둘레가 9㎞, 길이는 1,780m, 저수면적 103ha, 몽리면적 726ha였으나, 최대저수량이 얼마인지는 미상이다.
다만, 합덕지를 일명 연지(蓮池)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연이 생장할 수 있는 수심이라면 수심(水深)은 그리 깊지 않았으며, 저수면적에 비하여 저수량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합덕지의 기원은 미상이나 『당진군지(唐津郡誌)』에 따르면, 후백제 견훤(甄萱)이 이곳에 둔전(屯田)을 개간, 1만 2,000명의 둔병(屯兵)과 말 6,000필을 주둔시키면서 이 둔병에 의하여 합덕지가 개설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합덕지는 연꽃이 많았으나 남생이가 많이 자생하여 전설에는 둔병의 숫자가 이 남생이 숫자만큼 많았다고 한다. 또한, 합덕(合德)이라는 지명도 둔병들의 덕을 합치는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광린(李光麟)의 『이조수리사연구(李朝水利史硏究)』에 따르면 합덕지는 1768년(영조 44) 홍양호(洪良浩)가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부임하면서 1만 1,000명의 군내 장정을 동원해 준설 및 보수공사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1778년(정조 2)에는 군민 4,553명과 인근 군민 3,500명을 동원하여 결괴된 부분 2개소를 수축하였고 1792년에도 군민 3,000명과 인근 군민 3,500명을 동원하여 수축하였으며, 그 뒤에도 해마다 인근의 천안(天安)·덕산(德山)·면천(沔川) 등의 읍민의 협조로 필요할 때마다 보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합덕지는 1964년 폐제(廢堤)되기 이전까지 합덕평야의 쌀생산을 위한 유일한 용수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