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합덕제(合德堤)는 당진시 동남부의 곡창지대에 관개(灌漑)하던 호서 지역의 대표적인 수리 시설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 제방은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대합덕리 대호마을 앞에서 시작하여 동북쪽으로 합덕리 창말까지 서남동북 방향으로 축조되어 있다. 총길이 1,771m, 둘레는 89㎞에 이르는 거대한 방죽이었다. 제방의 평균 높이는 4m, 상부의 폭은 약 6.5m, 하부는 11~18m이다. 저수 면적은 175 정보[1.73㎢], 주1은 762정보[7.55㎢]로 조선시대의 수리 시설 가운데 최대 규모이다.
당진 합덕제의 축조 기술은 토성(土城)을 쌓는 방식으로 진흙과 나뭇가지, 낙엽을 켜켜이 쌓아 견고하게 다지는 ‘지엽부설공법(枝葉敷設工法)’과 제방의 흙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지반에 말뚝을 박고 흙을 쌓은 ‘무리말뚝공법’이 사용되었다. 1989년 4월 20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당진 합덕제의 기원은 백제 위덕왕[554598] 또는 무왕[600641] 재위 시기에 축조되었다는 설과 후백제 견훤(甄萱)이 쌓았다는 주장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견훤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기병(騎兵)과 보병(步兵) 9,000명, 군마(軍馬) 500여 마리를 성동산(城東山)에 주둔시키고 보루(堡壘)를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산 밑에 습지를 파서 군마를 먹일 물과 군량미 확보를 위한 시설로 못을 만든 것이 당진 합덕제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연지(蓮池)는 “합덕 땅에 있는데 길이 주2이며, 논 130 결(結)에 물을 댄다”라고 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1473년(성종 4) 영사(領事) 홍성윤(洪允成)의 주청으로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합덕제는 고려 때부터 쌓기 시작하였고, 조선조에 이르러 정분(鄭苯)이 또 감독하여 쌓았는데, 길이가 2,700여 척이고 일곱 고을이 수리(水利)를 입는다. 그러나 본래 둑이 낮고 약해 이제 또 비로 인하여 터져 무너졌으니 제언별감(堤堰別監)을 보내어 쌓아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둘레가 41만 1829척이고 깊이는 4척으로 되어 있다.
당진 합덕제의 운영 주체는 몽리 구역의 작인들로 구성된 연제수리계(蓮堤水利契)이다. 18세기 중엽 대홍수로 훼손된 제방의 복구를 계기로 발족된 연제수리계는 제언(堤堰)을 매개로 하는 수리 공동체의 산물이다. 설립 이후 1960년대 해체될 때까지 당진 합덕제의 관리와 관개를 전담하였으며, 여느 수리계와 달리 수세(水稅)를 징수하지 않는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방죽 내에 20~30정보의 경작지가 있어 매년 여기에서 나오는 도조(賭租)를 재원(財源)으로 충당하였기 때문이다.
당진 합덕제는 1963년 예당저수지 준공으로 수리 시설로서의 역사적 소명을 다하였다. 그러나 방죽의 제방은 그대로 보존되어 농경 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의미가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1,771m에 이르는 제방과 수변공원으로 복원된 연못은 농경 문화유산을 향유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그 유산의 의미를 널리 알리고자 2005년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이 개관하여, 당진 합덕제의 역사와 수리 · 관개 문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2017년 10월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로부터 인류에게 비약적인 식량 증산과 사회발전을 가져온 역사적인 관개 시설물로 선정, 주3’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