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발해 때 용원부(龍原府)였는데 여진이 이 곳을 차지하여 용이(龍耳)라고 하였다. 그 뒤 고려 공민왕 때 수복되었고 조선 태조 때 만호(萬戶)를 두었으며,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의 관할에 두었다.
수성역은 보발(步撥)에 의한 참(站)으로, 수성참(輸城站)이라고도 하였다. 수성도(輸城道)의 12개 역참 중의 하나로 부령(富寧)에 있는 회유찰방(懷綏察訪)의 지휘를 받았다. 수성역은 경성과 부령을 잇고 경성과 경흥을 동서로 잇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에 의하여 청진항이 건설되면서 수성평야지역에 무산·종성을 잇는 철도가 부설되었다.
더욱이 남만주철도가 종성에 이어지면서 일본의 만주 경략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수성평야 지역의 개발이 활발해졌다. 수성천 남쪽의 나남(羅南)에는 진해와 더불어 우리 나라 최대의 해군기지가 건설되었다. 같은 지명의 수성평야와 수성천(輸城川)이 있는데, 수성평야는 함경북도에서 가장 비옥하고 넓은 평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