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분묘 3기, 신도비 3기, 묘비 3기, 문무관석 8기, 장명등 2기 등 5종 19기의 유적이 있으며, 1995년에 추모재(追慕齋)를 짓고 부원군문 · 대제학문 등 재실과 연못 등 부속 시설물을 보수 정비하여 가문의 유품과 유물을 볼 수 있다.
묘역의 주인공은 양도공(良度公) 안경공(安景恭), 그의 아들 정숙공(靖肅公) 안순(安純), 안순의 아들 문숙공(文肅公) 안숭선(安崇善) 등이다.
이렇듯 3대에 걸친 묘와 부속 시설물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초기의 분묘제도와 석물의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경공(1347∼1421)은 안축(安軸)의 손자로 안종원의 아들이며, 부인은 오천 정씨로 정사도(鄭思道)의 딸이다. 136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사헌규정 · 전법전랑 · 삼사좌윤을 역임한 후, 1388년(우왕 14)에 예의판서에 올라 척불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개국공신 3등으로 좌대언이 되고, 이어 도승지 · 대사헌을 역임한 뒤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판한성부사를 거쳐 1416년(태종 16)에 집현전 대제학으로 부원군의 칭호를 받았다.
공은 대신으로서 조정의 표준이 되었으며, 경상도 · 전라도 ·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교화를 베풀었다. 75세에 세상을 떠나니 이곳 금천의 백사동(栢寺洞)을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내려 준 땅)로 하여 장사지내고 양도(良度)라는 시호를 내렸다.
안경공의 묘비는 높이 228cm, 폭 63cm, 두께 9cm로 글자 크기는 1.7cm이며, 세자우빈객 윤회(尹淮)가 글을 짓고 손자 안숭선이 전액(篆額)과 비문을 썼다.
안순(1371∼1440)은 세종 때 8년간 호조판서를 역임하여 애민과 구휼에 크게 기여했으며 판중추부사와 수문전대제학을 지냈다. 신도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 280cm, 비신 높이 181cm, 폭 96cm, 두께 32cm이다.
비문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이 지었으며, 1651년에 후손 사헌부 감찰 기량(琦良)이 추명(追銘)을 짓고 진사 긍렬(肯烈)이 썼으며, 생원 석중(錫中)이 전액을 썼다.
안숭선(1392∼1452)은 집현전 대제학을 역임하고 지춘추관사로 『고려사(高麗史)』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처음 임진강 임내 송림(松林) 고현(古縣) 북쪽의 주암동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후에 파주군 조리면 장곡지리(獐谷之里; 현 파주시 조리읍 장곡리)로 이장하였다. 그 후 1989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신도비도 이전되었다.
신도비의 크기는 총 높이 330cm, 폭 73cm, 두께 41cm이며, 비문은 성삼문(成三問)이 짓고 10대 후손 동준이 썼다. 1990년 6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