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초에 당나라에 가서 공부한 뒤 632년(무왕 33)에 당의 사신 고표인(高表仁)을 따라 고구려 승려 영운(靈雲)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대화(大化) 초기에 고상현리(高尙玄理)와 함께 일본 최초의 국박사(國博士)가 되었다.
645년(의자왕 5) 일본왕에 의하여 영운·복량(福亮)·상안(常安)·혜운(惠雲)·혜지(惠至) 등과 함께 일본 10사(師)로 뽑혀서 승려를 통섭하고 중생교화에 힘썼으며, 이듬해에는 일본왕의 명령을 받고 현리와 함께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팔성백관(八省百官)의 제도를 만들었다.
653년 병을 얻어 아담사(阿曇寺)에서 휴양할 때 일본왕이 직접 행차하여 위문하였다. 그해 6월 입적하자 일본왕은 그의 입적을 애석히 여겨 특사를 보내어 조문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 명공(名工)으로 하여금 많은 불상을 조상하게 하여 가와라사(川原寺)에 안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