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거창(居昌). 연산군 왕비 신씨의 일족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상주목사가 되었는데 가렴주구를 일삼아 당시 사람들이 의성현령 이장길(李長吉), 선산부사 남경(南憬)과 함께 3맹호(三猛虎)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람됨이 극히 탐욕스럽고 잔혹하여 아부에 힘써 신수근(愼守勤)의 총애를 받아 2품직에 승진할 수 있었다. 신극성이 수령으로 재직한 지역은 형법(刑法)이 준엄하게 실시되고, 침탈이 심하여 백성들이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게 되어 민가 10호 가운데 9호가 비게 되었다고 한다.
또 휘순공주(徽順公主)의 집을 짓게 되었을 때는 민가를 널리 철거하고 사치를 일삼아 많은 폐단을 야기시켰다. 1521년(중종 16)에 병조에서 신극성을 군직(軍職)인 사과(司果)에 추천하였는데 사헌부에서 맹렬히 반대하였으나 왕이 이를 관철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