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 장군 생가지 ( )

목차
관련 정보
신돌석 장군 생가지
신돌석 장군 생가지
주생활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에 있는 조선후기 평민 출신의 의병장 신돌석의 생가터. 생가지.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신돌석장군생가지(申乭石將軍生家址)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탄생지
지정기관
경상북도
종목
경상북도 시도기념물(1993년 02월 25일 지정)
소재지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에 있는 조선후기 평민 출신의 의병장 신돌석의 생가터. 생가지.
내용

1993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장군은 평민출신으로서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후 영해군 복평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유생출신의 의병장들이 가졌던 제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그는 지역주민들과의 긴밀한 협조속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의 공격을 교묘히 피하면서 수십차례의 유격전을 벌렸다.

이웃 고을인 진보의 이하현, 영덕의 정용기 의진(義陣)과도 일정한 연대를 가지면서 영해읍ㆍ평해읍을 차례로 점거한데 이어 울진읍으로 가면서 병력의 수효가 3천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영양ㆍ청송ㆍ의성ㆍ봉화ㆍ삼척ㆍ정선ㆍ강릉ㆍ원주 등 경북ㆍ강원도 일대 의병들의 활동도 함께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신돌석 장군은 영남지역 의병장 중 가장 활약이 컸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장군의 생가는 부친인 신석주(申石柱)가 1850년경에 초가로 세웠으나 일본 관헌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위해 정략적 차원에서 1940년 불태워 전소되었다. 그 후 1942년 우진와가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집필자
김용만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