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장군은 평민출신으로서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후 영해군 복평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유생출신의 의병장들이 가졌던 제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그는 지역주민들과의 긴밀한 협조속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의 공격을 교묘히 피하면서 수십차례의 유격전을 벌렸다.
이웃 고을인 진보의 이하현, 영덕의 정용기 의진(義陣)과도 일정한 연대를 가지면서 영해읍ㆍ평해읍을 차례로 점거한데 이어 울진읍으로 가면서 병력의 수효가 3천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영양ㆍ청송ㆍ의성ㆍ봉화ㆍ삼척ㆍ정선ㆍ강릉ㆍ원주 등 경북ㆍ강원도 일대 의병들의 활동도 함께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신돌석 장군은 영남지역 의병장 중 가장 활약이 컸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장군의 생가는 부친인 신석주(申石柱)가 1850년경에 초가로 세웠으나 일본 관헌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위해 정략적 차원에서 1940년 불태워 전소되었다. 그 후 1942년 우진와가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