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만년에 후학을 위해 강도(講道)하던 곳이다. 이현일의 본관은 재령(載寧)이며, 아버지는 이시명(李時明)이며,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아우이다. 1679년(숙종 5) 학행으로 천거되어 지평에 발탁되고, 대사헌 ·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나, 남인정권의 몰락으로 홍원 · 종성 · 광양 등에 유배되었다. 1699년(숙종 25) 2월에 방면하라는 왕명이 있었지만 사헌부 · 사간원의 반대로 1700년(숙종 26) 3월에 고향인 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같은 해 4월부터 안동 임하현 금소역(琴召驛)에 주1하였다. 그곳의 산천이 밝고 수려하며, 선영(先塋)에 성묘하기가 편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해 10월부터 역사(驛舍) 북쪽의 금양(錦陽)에 작은 집을 지었는데 재력이 부족하여 1704년(숙종 30) 8월에야 낙성하였다.
이현일이 금소에 우거하던 시기 사방에서 학생들이 모였는데 그들의 자질에 맞춰 가르치며 사서(四書)를 입문서로 삼았다. 실제 이현일과 교유하거나 가르침을 받은 문인들을 기록한 『금양급문록(錦陽及門錄)』에는 모두 358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영남지역 인사들로서 특히 안동에 거주하는 자들이 가장 많았으며, 서울을 포함하여 평안‧황해‧함경‧강원도에 거주하는 자들도 확인된다. 이를 통해 이현일의 학문적 위상과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방문과 활발한 강학 활동으로 인하여 만년에 건립한 금양의 처소는 그의 강도소(講道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강도소로 사용되던 집은 퇴락하고 그 터만 전해지면서 안동의 사림들이 1830년(순조 30) 집터에 단(壇)을 축조하고, 계(契)를 결성하여 이곳에 원사를 세우려고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후 1893년(고종 30) 단소 아래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워서 이현일을 추모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상량문을 보면 1901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자형 목조와가로서 안채는 덤벙주초 위에 네모난 기둥을 사용했고, 양쪽에 각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1931년 금양단소 계약증서」에 따르면 이 건물은 재사(齋舍)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96년 12월 5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