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미산서원은 1782년 조선 전기 문신 민신 4부자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에 설립한 서원이다. 계유정란 당시 화를 입은 민신과 그의 세 아들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충정사가 전신이다. 민신은 1781년 민치상의 상소로 복관되고, 이듬해 충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후 양지리에 그의 사당이 지어졌다가 1788년 도내 사림들의 건의로 아들 삼형제도 함께 병향하여 충정사가 되었다. 180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이때 강당과 동·서재를 갖추었다. 1868년 훼철된 후 1984년에 복원하였다.
미산서원은 민신(閔伸)과 민보창 · 민보해 · 민보석 등 4부자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충정사(忠貞祠)가 전신이다. 이들이 해남에 제향된 것은 민신의 손자였던 민중건(閔仲騫)이 1453년 계유정난 당시 화를 피해 남하했다가 혼인하여 정착한 이래로 여흥 민씨들이 해남에 세거하였기 때문이다.
1929년 민병승이 지은 민충정공 돈암선생 미산서원 유허비에는 1695년(숙종[명릉] 21) 복관(復官)되고서 마포면 양지리에 사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복관은 1781년(정조 5)에 민치상(閔致祥)이 계유정란 당시 참살되었던 이조판서 돈암(遯庵) 민신의 신원(伸冤)을 요청하여 그해 9월에 복관과 증시(贈諡)가 결정되었다. 민신과 함께 죽었던 세 아들인 민보창 · 민보해 · 민보석 삼형제도 신원되었다. 그 후 1782년(정조 6) 2월 민신에게 ‘충정(忠貞)’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시호가 내려진 인물은 불천위로 모셨기에 신원된 후 시호가 내려진 1782년부터 민신의 위패를 모포면 양지리[현 마산면 화내리]의 사당에 모셨다고 볼 수 있다.
1788년(정조 12) 영의정에 증직되었는데, 이때 국왕의 특명으로 전랑이 제수를 들고 내려와 10월 10일에 연시례(延諡禮)를 거행하였다. 당시 도내의 유림들은 충정사에 대한 사액과 민신의 세 아들에 대한 병향을 건의하였고, 사액은 받지 못했지만 세 아들의 병향은 허가가 되었다. 이때부터 민신의 아들 삼형제를 함께 제향하고, 향사우로서 '충정사(忠貞祠)'라 명명했다. 1800년(정조 24)에는 경향의 사람들이 논의하여 충정사를 현재의 해남읍 해리 미암산(眉岩山)[금강산] 기슭 아래로 이건하고, 강당과 동 · 서재를 갖추게 되었다.
1929년 유허비에는 이건한 후 미암서원이라 하고, 이때 세 아들도 병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향내에서는 서원의 규모를 갖춘 충정사를 이건한 후 그곳의 지명을 따라서 미암서원으로 불렀을 개연성은 있다. 국왕의 특명으로 연시례를 행하고, 사액을 청원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향촌에서 높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공식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읍지 등의 관찬사료에는 충정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사우를 건립한 후 사사로이 서원으로 명명하는 것은 당시 전국적으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1822년(순조 22)에는 민신과 민보창 · 민보해 · 민보석 4부자에 대한 정려(旌閭)가 내려지면서 이들을 제향한 충정사의 위상은 더욱 제고되었다. 또한 1803년 향유들의 건의로 미산서원에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 1408~1456)을 배향하였다. 박심문도 계유정란 당시 주1된 인물로서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산서원이 훼철된 후 그의 후손들이 1911년 죽음사(竹陰祠)[해남읍 연동리 남송마을]에 제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산서원은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거하여 훼철되었다. 그 후 1901년 서원 터에 단(壇)을 설치하고, 1929년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1982년 사림과 후손이 발의하여 1984년에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인 충정사, 내삼문(內三門), 4칸의 강당, 외삼문(外三門)이 있다. 사우에는 민신을 주벽(主壁)으로 민보창 · 민보석 · 민보해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매년 8월 중정(中丁: 두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籩) 4두(豆)이다. 현재 사우 앞에는 민병승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으며, 강당 앞에는 묘정비와 복원사적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