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성(汝成)·성백(成伯). 집의(執義) 신명규(申命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단(申鍴)이고, 아버지는 영중추부사 신사철(申思喆)이며, 어머니는 이규일(李揆一)의 딸이다.
1726년 (영조 2) 알성 문과에 별과로 급제하여 정자가 되고 이듬해 실록청도청낭청(實錄廳都廳郎廳)이 되었으나 이해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득세할 때 파직당하였다.
1729년 검열로 다시 등용되어 헌납·지평·정언·이조참의·대사성·부제학·도승지·이조참판 등을 거쳐 1741년 개성유수, 1743년 경기관찰사, 1747년 예조판서, 1748년 이조판서, 1753년 호조판서·병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 찬수당상(纂修堂上)으로 『천의소감(闡義昭鑑)』을 편찬하였다. 1756년 우의정, 1758년 좌의정을 거쳐 1762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해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히는 현장에서 방관하였다는 이유로,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한 왕에 의하여 파직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동생 신회(申晦)와 함께 형제가 정승직에 오른 흔하지 않은 경우의 인물이다. 그러나 재직시 송명흠(宋明欽)을 정중히 대접할 것을 청한 외에는 별다른 건의사항이 없었다. 시호는 효정(孝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