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용은 192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에서 성행한 근대적 형태의 새로운 춤이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때는 1926년이었다. 이후 전통춤이 아닌 새로운 예술 춤을 지시하는 용어로 일반화되었다. 신무용은 무용의 관념·형식·내용에서 새로움을 띠었다. 일제강점기에 신무용을 견인한 무용가는 배구자·최승희·조택원·한성준 등이었다. 그중 최승희와 조택원은 창작 레퍼토리로 신무용을 이끌었다. 역사적으로 신무용은 한국에서 근대적 형태의 춤이 창작되는 신기원을 열었다. 또 춤이 예술로서 발돋움하는 역할을 했지만 시대적 한계가 따랐다.
신무용의 문자적 뜻은 새로운 춤이므로 이전과는 다른 춤을 지칭하는 일반 용어로서 신무용이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사용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에서 신무용은 192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 무용인들이 추구한 특정한 춤 조류를 지칭한다.
신무용 용어가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때는 1926년이다. 당시 10대의 어린 나이였지만 한국 사회에서 아주 드물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신여성으로서 최승희가 1926년에 일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제자가 되어 일본에 춤 수업을 받으러 간 사실은 곧 서울에서 큰 화제거리가 되었고, 최승희의 근황을 보도한 신문 기사에 신무용 용어가 처음 등장하였다.
이후 전통춤이 아닌 새로운 형식의 예술 춤을 지시하는 용어로서 신무용은 일반화되고, 그러한 춤을 추구하는 무용가를 신무용가라 분류하였다.
신무용은 일본에서 유입된 용어이며, 한국의 신무용 양식 역시 초창기에는 일본을 경유해서 유입된 서구 양식을 활용한 춤을 지칭하였다.
일본에서 먼저 쓰인 신무용 용어는 일본 전통춤을 무대에서 변형한 조류와 그와는 무관하게 이시이 바쿠처럼 서양의 현대무용을 일본 무대에서 형상화한 조류를 지칭하고, 후자를 별도로 신흥무용(新興舞踊)이라 불렀다.
원래 일본에서는 1904년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遙)가 전통춤의 개혁을 주창하자 일본 전통춤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 창작춤을 지칭하는 신무용이 대두하였다. 또한 1910년대에 미국의 뉴 댄스(New Dance)나 독일의 노이에 탄츠(der neue Tanz) 운동에 자극을 받은 무용가들이 전통춤을 탈피하기 위해 구미에서 춤을 학습하고 일본에서 신흥무용 운동을 펼쳤다. 그래도 두 조류가 새로움을 담고 있은 점에서 일본에서는 모두 신무용이라 통칭한 것이 관례였다.
일본과 유사하게 한국에서 신무용은 최승희와 조택원에 의해 전통춤과 서구에서 유입된 현대무용 가운데 어느 한 쪽 아니면 양쪽을 절충 활용하는 방향으로 개척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특히 현대무용 이외의 외래 춤을 공연하는 흐름이 덧붙여졌다.
한국에서 신무용은 처음부터 확정된 개념을 갖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신무용 활동이 국내 무용가들에 의해 전개되면서 개념이 형성되었다. 먼저 서양식의 양춤[洋舞]을 비롯한 외래의 춤은 그때까지 한국에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신무용으로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이전과 다른 새 형태로 추어지는 신식의 춤도 신무용으로 수용되었다. 이 신식의 춤은 개화기 이후 신문화의 관념에 맞춰 창작 요소를 가미한 춤, 전래의 춤을 새롭게 각색한 춤, 그리고 전래의 미의식 및 움직임과 새로 창안한 움직임을 절충한 춤 등으로 세분될 수 있다.
이에 비추어 신무용에서 핵심 개념은 ‘신’과 ‘무용’ 두 가지이다. 여기서 무용은 일정한 체계를 바탕으로 무대 공연물을 목표로 조직된 것을 의미하며, 원래 예술 작품으로 창작되지 않은 것(예: 민속춤)이라도 신무용으로서 무대에서 각색되어 공연되면 예술 무용 또는 예술 공연작으로 인정받았다.
이와 같은 무용을 이전의 무용들과 다르게 ‘신’무용이라 인정해야 할 이유는 무용의 관념 · 형식 · 내용에서 새로움을 띠었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에 볼 수 없었던 무대 형식 · 관람 방식 · 움직임 방식 및 창작 의식을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신무용은 자율적 창작 · 춤의 독자성 · 춤 작품의 완결성을 바탕으로 옥내에서 공연되는 춤으로 형성되었다.
신무용 용어가 일반화하면서 무용이라는 용어 역시 일반화하고 예술 양식의 춤을 아우르는 용어로 정착하게 된다. 이에 따라 그전부터 있어온 춤과 무도(舞蹈)라는 말은 민속춤이나 사교춤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밀려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무용이 한국에서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 춤을 지칭하는 용어 이상의 역할을 하여 예술 춤의 관념까지 규정하는 개념으로 통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신무용이 대두할 초기에 관심을 모은 것은 무엇보다 이전 춤과 표면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1910년을 전후해서 점차 확산되던 정면 액자 무대 양식을 비롯하여 낯선 움직임과 의상 및 작품 내용이 그런 차이점에 해당한다. 그래서 당대에 양춤, 신식 춤으로도 불리던 신무용이 신소설, 신극처럼 새로운 근대 춤의 대명사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초기에 신무용이 충격파인 동시에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시기가 일정 기간 지속되고 나서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신무용은 작품의 내적 정서와 움직임을 중심으로 변화를 모색하였다. 창작 과정에서 신무용가들은 이를테면 작품의 민족적 정체성에 관해 해결책을 탐색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신무용은 한국적 정서를 비롯하여 전통춤의 특성과 가치를 수용하되 극장 공간 내에서 현대적 미의식에 바탕을 두고 창작된 춤으로 방향을 잡는다.
1902년 협률사의 개장 이후 서울에 세워진 광무대, 연흥사 등의 극장들은 잦은 공연을 통해 춤을 신문화 형태로 유포하였다. 1921년 해삼위(海蔘威)에서 고국을 방문한 학생음악단의 춤과 음악 연주 행사는 서구 무대 형식 및 러시아 풍의 사교춤과 민속춤을 갖고 신문화의 충격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 그러한 사교춤 및 민속춤을 무도 혹은 딴스로 공연하거나 가르치는 열풍은 모두 그 학생음악단의 행사 이후의 일이었다.
이처럼 신무용이 등장하기 전 신문화 시기에 이미 다른 형식의 춤에 관한 관심은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신무용은 무용가 개인의 창작물로서 새로운 형식의 춤을 뿌리내리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신문화 시대의 춤과는 구분된다.
최승희가 아직 일본에서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수련하며 무대 출연에 몰두할 시기에, 1928년 배구자는 자신의 음악무용회 공연에서 시골 아가씨로 등장하여 독무 「아리랑」을 발표하였다. 악극단 출연자였던 배구자의 「아리랑」이 예술성 면에서 초보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될지라도 한국적 정서 및 음악 율조(律調)에 어울리는 움직임을 발굴하고 무대화한 점에서 신무용의 효시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배구자의 춤 창작 작업은 활발하지 않고 단명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최승희가 1930년 창작무용 공연회를 가지면서부터 특히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춤 레퍼토리만으로 구성된 창작 춤 발표회를 여러 차례 가졌으며, 이로써 신무용의 시대가 실질적으로 열리게 된다.
1930년대에 최승희는 200편 가까운 소품 레퍼토리를 창작하여 신무용의 세계를 다양하게 탐색하였다. 이들 소품은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으로 대별되고, 또 1940년대에는 광복되기까지 동양 무용, 일본적 무용, 중국적 무용 소품들을 추가로 창작하였다.
이 점에서 유추되듯이 당시 최승희의 신무용은 한국무용, 현대무용 및 일본 등의 동양권의 춤사위를 바탕으로 레퍼토리에 따라 제각각 현대적 정서, 낭만적 분위기, 조선과 동양의 정취(情趣)를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제강점기에 신무용을 견인한 무용가는 배구자 · 최승희 · 조택원 그리고 최승희와 조택원에게 전통춤을 단기간에나마 전수하고 또 다수의 전통춤을 무대 공연 형식으로 정리한 한성준이었다. 그 가운데 최승희와 조택원은 창작 레퍼토리로서 신무용을 이끌었다.
최승희보다 1년 남짓 늦게 이시이 바쿠의 제자로서 춤에 입문한 조택원은 1934년 무용 발표회를 가지면서 신무용 창작에 가세하였다. 조택원은 최승희에 비해 작품 발표회와 창작 레퍼토리가 적었으나 조선무용의 부활을 강하게 의식하며 신무용 활동을 펼쳤다. 조택원의 작품은 유려하며 서정적인 소품이 중심을 이루는 한편으로 1940년대에 그는 대형 무용극을 몇 차례 시도하였다.
조택원의 대형 무용극 가운데 대표작인 「부여회상곡(扶餘回想曲)」이 조선총독부의 대대적 후원을 받고 내선일체의 취지를 저변에 깔은 점에서 신무용 역사에서의 큰 오점이었던 한편으로, 그의 대형 무용극은 신무용이 소품 중심의 세계를 벗어나 극장예술로서의 규모를 지향한 점에선 선구적이었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 무용인들은, 당시의 혼미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자주적(自主的)인 춤 예술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최승희도 귀국 직후에 서양의 현대무용과는 다른 이른바 한국춤 스타일의 무용극으로 해석되는 조선 발레를 창작하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처럼 자주적인 춤 예술이 관심사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신무용은 현대무용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동시에 주로 한국무용 분야의 무용인들이 추구하는 춤 장르로 인식되었다.
당시에 신무용이란 용어가 흔히 통용된 것은 아니었으나 신무용의 미적 특질은 춤 작품들에서 전반적으로 존속하였다. 광복 직후에 최승희의 월북과 조택원의 해외 활동으로 인해 신무용 분야는 세대가 교체되었다. 그러나 신무용이 예술 양식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시기와는 달리 어느 무용가를 신무용가로 특정하지는 않았다.
1970년 무렵까지 신무용은 점차 현대적 양식으로 창작된 한국무용으로 통용되는 추세를 보였다. 그렇지만 신무용 초창기 때부터 한국 전통춤을 비롯하여 현대무용 및 외래무용을 취사 절충하며 확정된 양식을 갖지 않은 관행을 지속하면서 신무용은 한국무용 이외의 춤을 활용하는 작품까지 포괄하였다. 다종다양한 외래 춤들을 신무용으로 용인하는 이와 같은 현상은 신무용이 대두한 역사적 맥락과 결부된다.
그리고 신문화 시대 이후 서구 문물에 대한 동경심 즉 서구 지향성은 신무용 초기 시대 이래 춤 창작자들이 서구의 시각에서 비서구를 대상화하는 이국 취향과 오리엔탈리즘을 수용하도록 유도하였다. 1960년대까지 인도 · 동남아 · 하와이 · 스페인 등지의 춤을 한국무용이나 현대무용과 병행하는 무용가 및 공연이 적지 않았고, 이들 무용가는 신무용 세대로 분류된다.
신무용은 독자적인 춤 양식에 필요한 움직임의 체계를 갖추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을 축으로 형성되었다. 광복 이후 한국무용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 형식의 예술 춤으로 정립되어 가던 시기에도 신무용의 움직임 체계는 분명치 않았으며, 이런 상황에서 한국무용이라는 개념이 점차 신무용을 대신하게 된다.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무용이 춤 어휘와 기법을 개발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며, 이에 더하여 창작무용이 예술 춤 작품의 내적 분위기와 소재를 쇄신하는 의지를 펼치던 시기에 신무용은 퇴조하였다.
역사적으로 신무용은 한국에서 근대적 형태의 춤이 창작되는 신기원(新紀元)을 열었다. 특히 춤에 근대적 예술 의식을 도입한 신무용에 의해 춤은 예술로서 발돋움하였다. 그리고 신무용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춤의 특성과 존재를 국제적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신무용에는 무엇보다 시대의 제약에 따른 한계가 따랐다. 먼저 예술 측면에서 신무용은 한국무용(주로 전통무용)과 현대무용 및 외래 무용 사이에서 그 양식들의 어법을 차용하거나 절충하는 데 머물러 독자적 양식을 창출하는 데는 부진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경유해서 현대무용 등 외래 춤이 유입되며 표현의 자유가 심한 제약을 받았고 낭만적 예술관이 지배적이었으며 춤과 예술 교육 체제 등의 여건이 매우 불비했던 점은 신무용의 그와 같은 한계를 심화시킨 배경으로 들어진다.
창작을 주목해 볼 때 신무용 초기에 현대무용이 다수를 이루다가 광복 이후 한국무용 어법이 신무용의 근간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전되면서 조선(한국) 무용의 창조로 나아갈 여지도 있었지만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 등의 요인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아울러 신무용의 작품들에서 창작자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이 춤의 개성적 어법보다는 출연자를 겸한 춤 창작자의 개인적 체취(體臭)나 인상에 의해 판별되는 근본 원인도 독자적 양식의 부진으로 인해 창작자 개개인의 어법 역시 뚜렷하지 않았던 데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 신무용 공연들은 대체로 다수의 소품 레퍼토리를 일시에 공연하는 관행 속에서 산만한 구도로 진행되었고 작품들이 환기하는 정서나 소재도 단편적 경향으로 흘렀다.
더욱이 신무용 초기부터 신무용 및 예술 춤과 동일시되다시피 한 무용시(舞踊詩) 개념은 그러한 단편성을 굳히는 작용을 함과 동시에 당대의 시대 상황과 함께 예술 춤이 유미적이며 낭만적 세계에 안주하도록 유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대다수의 신무용 작품에 내재한 고답적 성향은 낭만적 세계관과 결부되며, 이로 인해 신무용은 작품 전개에서 서정적 줄거리를 중심으로 개인적 감정을 과도하게 노출하는 폐단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