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옥과(玉果)(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출신. 풍류를 하던 율객(律客)으로 동생 영초(榮草)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사당패들이 부르던 「사거리」뒤에 ‘화초염불’을 지어서 「화초사거리」를 지어냈다. 「화초사거리」는 중모리장단으로 되었는데 전반의 ‘긴염불’ 대목은 남사당패의 「사거리」와 같이 경토리로 되어 있고, 후반은 ‘화초염불’이라 하는데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긴염불’ 부분은 불규칙한 세마치장단으로 된 「사거리」를 그가 중모리장단으로 짠 것 같다. 그가 「화초사거리」를 짓자 많은 소리꾼들이 불러서 세상에 널리 퍼졌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장판개(張判介)·조진영(趙進榮)·한똑똑(韓獨得)과 같은 명창들이 「화초사거리」를 잘 불러 유명하였고, 「화초사거리」가 널리 불려지자 남쪽지방에서 본래 사당패들이 부르던 「사거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화초사거리」는 경토리와 육자배기토리를 융합시켜 멋들어진 가락으로 짜여져 있는데, 뒤에 잡가 소리꾼들은 그의 공을 흠모하여 그전까지 부르던 ‘방초(芳草)는 연년록(年年綠)이요’라는 노래에 방초라는 말이 들었다 하여 이 대목은 부르기를 삼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