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본래 한번 태어나면 반드시 늙어 죽게 마련이나, 그런 숙명에서 벗어나 젊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이 확대되어 불로장생을 갈구하는 신선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신선사상은 지역·인종·시대 등에 따라 그 개념이나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중국에서는 주로 제왕이나 제후 등 현세적인 권력과 쾌락의 영속을 바라는 계층에서 적극적으로 신선을 갈구하여 불로장생을 기도하는 방향으로 그 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조식(調息)·복이(服餌)·도인(導引)·방중(房中) 따위의 신체단련 내지 생리조절의 방법을 개발하고 불사약을 구하거나 금단(金丹)을 만들기 위하여 애쓰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방사(方士)가 생겨나 술수를 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상고시대 민족 형성 내지 국가 창건의 단계에서 신선사상이 형성되었으면서도 천계와의 관련을 중요시하여, 거기서 교훈을 이끌어 내고 민족 발전의 방향을 조정하며 개인생활의 품위를 높이는 목표를 찾아내는 등 공동체의 향상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한국 신선사상은 단군의 건국과 연결되는 신관(神觀)에서 전개된다. 이 신관에는 두 계열이 있다. 다 유일신을 숭봉하기는 하나, 한 계열에서는 환인(桓因)을 유일신으로 받든다. 이것을 환인 계열로 부르기로 한다.
다른 한 계열에서는 환인(桓因 또는 仁)도 태고의 군장인 감군(監群)으로 다루고 신은 사백력(斯白力)의 하늘에 따로 있는 것으로 받든다. 이것을 사백 계열로 부르기로 한다.
이 두 계열에서는 사상 전개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 환인 계열에서는 환인의 4차례의 명령을 받들어 환웅(桓雄)이 궐천세(闕千歲)로 표현되는 수수십만 년에 걸쳐 천지부판(天地剖判)을 비롯하여 일월성신과 동식만물에 인류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만들고 태백산(太白山)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여 그 군장이 되었다.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한 환웅은 환인이 하늘에 임어(臨御)하는 신향(神鄕)으로 올라간다.
이것이 한국 신선설의 요점 가운데 하나인 공완조천(功完朝天), 곧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는 하늘로 올라간 실례로 꼽힐 수 있는 일이다.
그 뒤를 이어 초대 단군 왕검이 군장으로 추대되어 조선을 창업하고 신시의 법도를 계승하여 국가의 규모를 갖추고 천제를 올리고는 <대고 大誥>를 반포하여 사람이 지킬 도리를 일러준다. 이 단군의 <대고>는, 사백 계열에서는 ≪삼일신고 三一神誥≫로 조정하게 되어, 결국 한국 신선사상의 핵심 부분을 이룬다.
단군조선은 왕검 한 사람이 1,500년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47대의 단군이 계승하였고, 또 반드시 부자상전하지만은 않았다. 사백 계열에서는 최고일신(最古一神)이니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니 하여 유일신을 따로 내세운다.
환인은 그 아래에서 한 감군으로 환국(桓國)을 창건하여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7대를, 제7대 환인 때 서자부의 환웅이 태백으로 파견되어 신시를 세우고 그 군장이 되어 18대를 이어 내려오고, 그 뒤를 이어 단군 왕검이 조선을 창업하여 47대를 계승한 후 부여-고구려-대진(大震:渤海)으로 정통이 이어진 것으로 하였다.
한국 신선사상의 엄격한 기원은 탐색해 낼 문헌자료가 부실하나, 그러한 사상은 한민족의 기원을 추구하는 데서 나와 유일신을 받드는 신앙에서 추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환인 계열의 사상이 순박한 원초성을 띠고 있고 사백 계열은 환인 계열의 사상을 수정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규원사화 揆園史話≫의 <조판기 肇判記>에는, 암흑 혼돈한 태고 시절을 말하고 그와는 별도로 원래부터 존재해 있는 환인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을 부각시켰다.
“상계(上界)에는 따로 일대주신이 있어 그를 환인이라고 하는데, 전세계를 통치하는 한량없는 지능을 지니고 있지만, 그 형체는 나타내지 않고 가장 위의 하늘에 앉아 있고 그의 거처는 수만 리이고 항시 광명을 크게 드러내고 휘하에는 또 무수한 작은 신들이 있다. 환이라는 것은 광명이고 그 체모를 형상한 것이며, 인이라는 것은 본원으로 만물이 그것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동서 <단군기 檀君記>에는 단군 왕검이 반포했다는 <대고>의 서단인 앞부분에 유황일신(惟皇一神)이 최상일위에 임어함이 강조되고, 하늘의 궁전에 거처함과 만선만덕의 근원임이 밝혀지며, 그 권능과 섭리가 언급되고, 신향(神鄕) 곧 유황일신이 임어하는 고장이 대길상(大吉祥) 대광명한 곳으로 제시된다.
이 신향은 한국 신선가의 궁극적인 지향으로, 성통공완(性通功完)하면 조천(朝天:입궐하는 것)하여 신향으로 귀속되는 것으로 확정지어져 있다. 성통이라고 함은 사람이 타고난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이르는데, 유황일신과 불가분의 관련이 내포되어 있다. 공완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받은 사명을 완수함을 이른다. 한국 신선사상의 핵심이 표명되어 있는 기술이다.
천신에 대한 외경과 순수하고 성실한 노력을 통해 천상에 있는 신향의 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신선가 뿐 아니라 한민족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던 사상이라고 여겨진다.
한민족의 태고시대의 한 국체로 환국(桓國)을 제시하고 최고일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음과 그 일신의 성격 내지 상황을 설명하고 환인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일신을 독화지신(獨化之神), 곧 독자적으로 자기의 의지에 따라 변화하는 절대자인 신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마치 공행(功行)이 차서 득도 승천한 신선같이 느껴지게 한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 三聖記全上>에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환이 나라를 세움에, 최고의 일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는데 독화하는 신이다. 그 광명은 우주를 비추며, 변통자재한 변화는 만물을 생성하고, 죽지 않고 오래 살며, 항상 쾌락해질 수 있고, 지극한 기운을 타고 놀며, 자연과 묘하게 합치하고, 작위함 없이 일하며, 말없이 행하고, 매일 동녀 동남 8백을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 보낸다. 이에 환인 역시 감군으로 천계에 살면서, 돌을 쳐서 불을 내어 처음으로 익혀 먹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그것을 환국이라 하고, 그를 천제환인씨(天帝桓因氏)라 하며, 안파견(安巴堅)이라 칭하기도 한다. 7대를 지내 내려왔으니 그 연대는 알아볼 수 없다.”
사백력은 시베리아(Siberia)를 연상하게 하고 안파견은 ‘아바지’의 음역으로 보기도 한다. 흑수와 백산은 흑룡강과 장백산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장백산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다. 백산은 천산(天山)의 다른 이름으로도 쓰인다.
사백 계열에서는 유일신을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라 하여 일신이면서 3가지 공능을 발휘한다는 신관을 견지하는데, 그 공능은 다시 5가지로 확대되어 오제설(五帝說)로 이어진다.
삼신의 작용을 ① 천일:조화, ② 지일:교화, ③ 태일:치화로 나누고, 이것이 다시 오제로 분화되어 동서남북 중의 사명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용이 분화되나 신이 복수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사백 계열에서 내세우는 인류의 시조 이름은 나반(那般), 그 배필은 아만(阿曼)이고, 환족은 나반과 아만의 후손이다. 환국의 초대 군장 환인은 본래 천산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사백 계열에서는 초대 환인이 “득도장생하여 온몸에 병이 없다.”고 하였으나 자신의 불로장생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해서 교화를 일으키고 무기 없이 평화롭게 살도록 만들어 사람들이 모두 근면하게 일하고 굶주림과 추위로 고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여 득도장생의 공용성이 강조되었다. 환국이 7대 3301년 또는 6만3182년이라고 하였으니 역대의 환인은 대단한 장수를 누린 것이 된다.
태우의환웅(太虞儀桓雄)은 사람들에게 묵묵히 생각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호흡을 조절해서 정기를 보존하여 장생구시(長生久視)하는 술법을 가르쳐 신선술을 실천하도록 하였다.
신시씨(神市氏)가 본성에 통달하여 참됨을 이룩하는 것을 지향해서 전(佺)으로 수행 재계하게 하고, 청구씨(靑丘氏)가 천명을 알고 선(仙)을 넓힘을 지향하여 선(仙)으로 법을 세웠고, 조선씨가 정기를 보존하여 수명을 연장함을 지향하여 종(倧)으로 왕업을 세웠다고 하는 것들도 다 신선술을 시행한 예이다.
환웅시대의 선인 발귀리(發貴理)는 천신을 제사하는 뜻을 밝힌 송축문(頌祝文)을 지어 삼신즉일상제의 체용과 권능을 설명하였다. 중국 전설의 복희(伏羲)가 그었다는 희역(羲易)은, 발귀리와 동문수학한 복희가 환족의 우사(雨師)가 전하는 환역(桓易)을 본받아 그어 낸 것이라고 한다. 환과 희는 같은 뜻이고, 복희는 한족의 인물이었다.
자부(紫府) 선생은 발귀리의 후예로 득도하여 천계로 날아올라간 신선으로, 칠성력(七星曆)의 시초인 <칠정운천도 七政運天圖>를 제작해 냈다. 이러한 칠성력의 원리와 오행치수법은 신시의 ≪황부중경 黃部中經≫에서 나왔고, 중국 신선가의 <황제내문 黃帝內文>·<음부경 陰符經> 등을 포함한 ≪황제중경≫도 신시씨 이래의 전승이며, 단군 왕검의 태자 부루(夫婁)가 오행치수법을 우(禹)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중국 문화의 연원을 한족에서 구하는 한국 신선가의 논법이다.
신선사상은 산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한 예로, ≪장자 莊子≫의 <재유편 在宥篇>을 보면 황제(黃帝)가 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가 장생의 도리를 배우는 대목도 공동산(崆峒山)이라는 산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산악으로 뒤덮인 우리 땅에서 퍽 일찍부터 신선사상이 싹텄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능화(李能和)는 공동산이 우리 나라인 청구(靑丘)의 땅에 있었다고 보고, 중국 도교의 조종 격인 장량(張良)도 우리 나라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봄으로써 중국의 신선설 내지 도교의 연원이 우리 땅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에 나오는 단군에 관한 기사는 이러한 산악신앙과 신선사상이 얽혀 있는 예로 들 수 있다.
환인(桓因)은 제석(帝釋) 또는 상제(上帝)로 주석되기도 하고, 불교에서는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또 제석은 천주(天主)라고도 하여 천상계의 통치자로 이해되어 왔다.
천상의 통치자인 환인은 우리 먼 조상들에 의해 매우 친근해질 수 있는 인간성을 갖춘 존재로 인식되었고,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홍익인간’으로 표현되듯이 그 권능을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행사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환인 내지 하느님의 관념은 우리 겨레의 가슴 깊이 자리잡고 내려오면서 그 공통된 경외심이 외래 종교의 최고신 또는 유일신을 받아들여 합치시키는 경지까지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후세의 선가(仙家)는 ‘환’은 광명으로 ‘인’은 본원으로 풀이하여, 환인을 일대주신(一大主神)으로 한량없는 권능을 가지고 전세계를 통치하지만, 형체는 나타내지 않고 가장 위의 하늘에 앉아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규원사화≫의 <조판기>에 따르면, 사람은 불멸하는 영명한 영혼이 있어서 선을 돕고 악을 멸함으로써 본성에 통달하여 공업(功業)을 완성하면 하늘에 올라 일대주신, 곧 환인의 고장인 신향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환인의 서자인 환웅(桓雄)은 천하를 다스릴 뜻을 가지고 3,000도중을 거느린 채 천상으로부터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에 강림하였다. 환웅은 신웅(神雄)이라고도 하고, 그가 건설한 도성을 신시(神市)라 하며, 그곳의 나무를 신단수(神壇樹)라고 부르는 등 ‘신’ 자를 붙인 것은 그것들을 신성시하는 뜻 외에 환웅과 그가 거느린 도중이 지상의 인간들과 달리 장생불사하는 신선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군의 기사에는 환웅이 강림하여 신시를 건설하고 단군을 탄생시킨 일만 쓰여 있고 다른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세의 선가들은, 환웅이 이 밖에 ‘궐천세(闕千歲)’로 표현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겨레를 무위자연의 도리에 따라 다스려 만대의 기틀을 잡아 놓고 신선이 되어 천상으로 돌아갔다고 설명하였다.
환웅은 환인의 명을 받들어 하늘과 땅을 갈라 놓고 신시를 건설하여 설교치세(設敎治世)하다가 단군에게 계승시키기까지 수십만 년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단군이 중국의 요(堯)임금과 동시대라고 하면, 그 이전의 궐천세는 중국 전설상의 시대보다 오히려 오래된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 겨레가 한족(漢族)이나 그 밖의 민족과는 별도로 독립된, 그리고 장구한 문화의 연원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단군의 기사는 극히 간략하지만 그러한 것을 배경으로 하여 환웅의 사업을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사실은 이 땅의 선파들에 의해서 예로부터 전승해 온 것이지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화 마리산(摩利山)의 참성단(塹星壇)은 제천을 위한 제단이었다. 단군 왕검 초기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 강화의 옛 이름)가 남이(南夷)의 관경(管境)이었고, 남이가 반란하자 아들 부여(夫餘)를 파견하여 평정하고 축성까지 했는데, 단군 왕검이 남순길에 마리산에 올라가 제천하였다. 단군 왕검의 세 아들(夫餘, 夫蘇, 夫虞)을 시켜 축조했다 하여 그 성을 삼랑성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마리산 참성단에서의 제천행사는 고려시대 이후는 도교의 재초(齋醮)의식으로 거행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고, 참성단의 상방하원(上方下圓:상부는 네모나고 하부는 둥금.)의 형모에 대한 의미 부여도 시도되었다.
마리산의 마리는 ‘머리’의 취음으로 보고 마니산(摩尼山)으로도 불리는데, ‘니(尼)’는 후에 고쳐진 것이다. ‘塹星壇’은 본래 삼랑성 안에 개토(開土)하여 만든 제단이라는 뜻의 ‘참성단(塹城壇)’이었고, ‘星’은 후에 도교의 영향을 받아 고쳐진 것이라 여겨진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국왕이 마리산에서 제천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환단고기 桓檀古記≫에 들어 있는 이맥(李陌)의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조에서 마리산에 당도하여 참성단에 올라가 삼신을 제사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고구려에서 단군 왕검이 시작한 제천행사를 이어받았다는 것이 한국 신선가의 전승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18년(408) 8월에 왕이 남순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때의 고구려 영토는 강화도보다 훨씬 남쪽인 광양만 근처까지였으므로 호태황이 참성단에서 제천할 수는 있었다. 이맥의 기술에 따르면 호태황이 참성단에서 삼신을 제사할 때 천악(天樂)이라는 음악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제천하는 일은 국왕의 권한에 국한되지 않고 누구나 다 할 수 있었다. 복희(伏羲)도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제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복희는 후에 서토(西土, 지금의 중국 중부)로 진출하여 수인씨(燧人氏)를 대신해서 천하를 호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 영양왕(590∼617 재위) 때 침입한 수나라의 대군을 격멸한 명장인데, 경건한 마음이 있어 입산수도 끝에 꿈에 천신이 현몽하여 대오 각성하기에 이르렀고, 매년 3월 16일에는 마리산에 달려가 천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경배하였으며,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하였다는 것이다.
단군 왕검은 태백산정의 신시에서 내려와 정식으로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게 되었다. 왕검은 현실적인 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아사달(阿斯達)로 천도하였고, 1500년 뒤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또다시 아사달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단군은 거기서 산신이 되었고, 무려 1,908세의 수명을 누린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일설에 신선이 되어 죽지 않았다고도 한다. 단군 47대설이 있기는 하나 단군이 2,000세에 가까운 수명을 누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신선설을 연상시키기에 족한 일이어서 이 땅의 선파에서 환인·환웅과 함께 단군을 도맥의 조종 가운데 하나로 편입시킨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하겠다.
≪청학집 靑鶴集≫에 따르면, 단군이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된 뒤에 문박씨(文朴氏)라는 사람이 아사달에 살면서 단군의 도를 전하였다고 한다. 또 ≪백악총설 白岳叢說≫에 인용된 영랑(永郎:向彌山人)과 남랑(南郎:南石行)의 말에 따르면, 문박씨는 환인의 도의 원류를 터득하고 결청지학(潔淸之學:깨끗하고 맑게 사는 가르침.)을 전하였고, 환인은 본래 대왕씨(大往氏)를 시켜서 ≪시서 始書≫를 저술하게 하고 자기는 ≪종서 終書≫ 1권을 지었다고 하였다.
≪시서≫는 풍우·오곡·음식 및 연양(練養)의 도를 주관하고 무엇보다도 성신(誠信)과 불투불음(不偸不淫)을 인간의 선한 일로 쳤다는 것이고, ≪종서≫는 일월·성신·천지·산천의 이치, 성명(性命)의 본원 및 신도(神道)와 묘덕(妙德)의 교훈을 주관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대왕씨를 시켜 중외의 선관(仙官)들에게 ≪종서≫를 반포하게 하였고, 대왕씨는 그 도중들과 함께 환인을 문조씨(文祖氏)로 불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환인의 도는 그 책들과 함께 문박씨에게 전해지고, 다시 을밀(乙密)·영랑·안류(晏留)·보덕(普德) 등으로 전승되어 내려왔다는 것이다. ≪백악총설≫의 저자는 그 책들을 태백산인에게서 얻어 보았다고 하였다.
이렇듯 환인과 환웅을 계승한 단군은 신선이 되었고, 그 교훈은 결청지학으로 요약되어 문박씨를 거쳐 신라 사선(四仙)의 인물에게로 전해 내려간 것으로 되었다. ≪제왕운기≫에서는 “이 땅의 모든 군장들이 누구의 후예인가 하면 그들의 세계는 역시 단군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다.”고 하였다.
고구려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살펴보면, 그 건국에 얽힌 신이한 사적이 적지 않다. 고구려는 동맹(東盟)이라는 풍습이 있던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하늘을 경외하고 신을 숭상하는 기풍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조 동명왕 고주몽(高朱蒙)은 천제(天帝)의 손자로 되어 있고,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解慕漱)는 천제의 태자로 기원전 59년에 천제에 의하여 부여왕의 고도(古都)로 파견된다.
해모수가 천상에서 강림할 때 오룡(五龍)의 수레를 탔고, 흰 따오기를 탄 수행인원이 100여 인이나 되었다. 하늘에는 채색구름이 떠 있고 그 구름 속에서 음악이 울려 나왔다.
이 경우에도 웅심산(熊心山)이라는 산악에 강림하여 10여 일이 지나서야 지상에 내려와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물녘에는 하늘로 올라가곤 하였다. 해모수는 유화(柳花)의 몸에 주몽을 잉태시키고는 혼자서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천제의 손자인 주몽은 많은 이적(異蹟)을 행하였는데, 그 자신 개사수(蓋斯水)에서 어별교(魚鼈橋)를 얻을 때와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천제의 손자임을 내세웠다.
그는 고구려를 창건하여 18년 동안 재위하다가 40세 되던 해 가을에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태자였던 유리(類利:瑠璃)는 부왕 주몽이 남기고 간 옥편(玉鞭)을 용산(龍山)에 묻어 장례를 지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해모수와 주몽의 신이성(神異性)은 단군에 관련된 그것과 얼마쯤 유사한 점이 있다. 천제 내지 상제의 자손을 칭하면서 국가의 시조를 내세우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이적에 대한 순박한 생각이 반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겨레가 하늘을 숭경하고 천제와의 혈연을 믿어 긍지를 지니고 산 일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해모수가 천상에서 많은 수행인원을 거느리고 하강하는 상황은 마치 도교에서 신선의 거동을 형용하는 경우와 유사한 점이 있다. 동명왕 주몽은 단군 왕검같이 지상에서 장수하지는 못하였으나 하늘로 올라갔다. 이렇듯 고구려의 건국신화도, 단군신화와는 별도로 신선사상과 연결되어 있고, 고구려의 한 지파가 세운 백제도 해모수와 주몽의 고사(故事)를 전승하였다고 하겠다.
신라시대에는 선풍(仙風)이 성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군에 의해 전해진 환인 이래의 도를 문박씨로부터 계승했다는 영랑(永郎)은 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詳) 등과 함께 신라 사선으로 불린다. 이들은 영남인 혹은 영동인이라고 하여 종잡을 수 없고, 일설에는 신라 이전의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결청지학이라는 이 땅 고유의 선풍을 계승한 영랑은 노우관(鷺羽冠)을 쓰고 철죽장(鐵竹杖)을 짚고 다니는데, 90세가 되어서도 신색이 어린아이 같고 행색이 기괴했다고 한다.
사선의 유적은 장연(長淵)의 아랑포(阿郎浦), 지리산의 영랑호(永郎岵) 등에도 있으나 고성(高城)의 삼일포·사선정·단혈(丹穴), 통천의 사선봉, 개성의 선유담·영랑호, 금강산의 영랑봉, 강릉의 한송정 등 주로 영동에 몰려 있다. 한송정에는 신선이 선단을 연조하던 돌아궁이와 돌절구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이들 사선은 대낮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고 한다.
선단 연조나 백일승천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세속적인 일에 상관하지 않고 호방불기하게 산수간을 오유(娛遊)하는 것이 결국은 사선의 행태라고 하겠는데, 속세에 얽매어 헤어나지 못하는 대중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들 사선은 추종자가 많아 도중 3,000인과 함께 다녔다고 한다. 이 3,000의 도중은 환웅이 강림할 때 거느린 도중의 수와 같다. 이들 도중 역시 속세로부터 초탈하여 자유스러운 생활을 즐겼을 것이고, 수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청지학으로 요약된 선도체득(仙道體得)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사선이 일으킨 선풍은 신라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굳건한 전통을 이루었다. 최치원의 <난랑비서 鸞郎碑序> 첫머리에, 신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어 그것을 풍류라 하고 그 가르침을 마련한 근원은 ≪선사 仙史≫에 있다는 말이 나온다. 풍류도가 있었고, 그 기원이 선가의 역사를 다룬 책에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풍류도는 결국 신라 선풍을 이어받은 화랑도의 지도이념 내지 기본 사상이었다. 신라의 ≪선사≫가 전해지지 않아 풍류도의 내용을 적확하게 알아보기는 힘드나 풍류라는 말뜻만을 가지고 본다면, 세속적인 일에서 초탈하여 고상하게 산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어, 풍류도는 그러한 정신을 내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풍류도는 결청지학과도 의미상으로 합치되고, 신라 사선의 행태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어쩌면 한국의 멋의 연원도 이 신라의 풍류도에서 찾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576년(진흥왕 37)에 시작된 화랑제도는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사선의 유풍을 계승하고 거기에 유·불·도의 덕목들을 보충하여 인재 양성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선·지선·선랑 등의 별칭이 있는 화랑은 많은 낭도를 거느리고 원근의 산수에 노닐면서 도의도 연마하고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으니 사선의 행태와 매우 방불하다. 그래서 후세에는 사선까지도 신라의 화랑으로 여기는 사례가 생겼다.
신선사상이 화랑의 단계에 와서는 인재 양성을 위한 국가의 제도에 수렴되어 이전의 소극적인 의의를 지양하고 신체의 단련, 무예의 연마, 대의의 각성, 관용과 희생을 앞세운 기개의 함양 등 적극적인 방향으로 그 수련내용이 확대되었다.
공완조천의 관념을 생각해 본다면, 인재의 선발이나 양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이와 연결하여 신라의 화랑제도를 생각하게 된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이암(李嵒, 1297∼1364)의 <단군세기> 13대 단군 흘달(屹達) 무술 20년조에 미혼 자제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게 하여 그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고 그들의 행색을 두고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다만 진흥왕(眞興王, 539∼576 재위) 때 화랑도가 비로소 제도화되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동떨어진 느낌을 갖게 한다.
한편, 고구려의 고국천왕 13년(191) 을파소(乙巴素, ?∼203)가 국상(國相)으로 선인도랑(仙人徒郞)제도를 만들어 인재를 양성한 사례가 있어 화랑제도의 선성이 되었다는 것이 사백 계열의 견해이다. 을파소의 선인도랑제도는 교화[文]를 다루는 참전(參佺)과 무예[武]를 다루는 조의(皁衣)로 2분되어 있다. 정사에도 고구려의 선인 관직이 나온다.
을지문덕(乙支文德)도 신선가 계통의 인물로, 도로 천신을 섬기고 삼신일체의 기운을 받아 재세이화(在世理化:세상에 살면서 올바른 도리를 터득함.)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함을 말한 바 있다.
신라의 화랑제도는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선의 유풍을 계승하여 이렇게 조정된 신라의 선풍은 고려시대에까지도 이어져 내려갔다. 예종은 1116년 5월 경진일에 내린 제서(制書)에서 신라 사선의 유적을 영광되게 받들 것과 국선, 즉 화랑의 일을 대관의 자손을 시켜 행할 것을 명하였다. 의종도 1168년 3월 무자일에 신령(新令)을 반포하고, 그 제5조에서 선풍을 숭상하도록 명하였다.
이곡(李穀)의 <동유기 東遊記>에 신라 사선이 오유한 강릉 경포대에서는 달밤이면 사선이 즐기는 생소(笙簫)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그것은 사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여전히 악기를 연주하고 명승지를 소요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선의 유풍을 이어받은 화랑도 그 도중과 함께 노래와 음악을 즐겼다. 이렇듯 신라의 선가는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선의 중심 인물인 영랑의 도를 계승하였다는 여류선가 보덕(寶德)은 거문고[琴]를 안고 다니며 그것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보덕은 선녀로도 불렸는데, 용모가 물에 뜬 연꽃 같았고 바람을 타고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가락국왕에게 자연의 순리대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일깨워 주었다는 감시선인(旵始仙人)은 금선(琴仙) 또는 칠점선인(七點仙人)이라는 별칭도 있는데, 한옥(寒玉) 같은 용모를 지닌 그는 역시 거문고를 안고 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내해왕(재위 196∼230) 때의 공신 물계자(勿稽子)도 나중에 속세를 버리고, 거문고를 안고 사체산(師彘山)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효공왕 때 도선(道詵)이 금강산에서 그를 만났는데, 어린아이 같은 얼굴에 눈같은 살결을 하고 물병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 나이를 알아보았더니 800세에 가까웠다고 하였다.
거문고[玄琴]의 창제자인 옥보고(玉寶高)는 경덕왕(재위 742∼764) 때 사찬(沙粲) 공홍(恭汞)의 아들로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워 선도를 터득하였는데, 학금선인(學琴仙人)·옥부선인(玉府仙人) 등의 별칭이 있다.
가야금의 명수인 우륵(于勒) 또한 신선으로 지목된다. 이 밖에 음악과 관련이 있는 일로 향가(鄕歌)와 그 신통력으로 알려진 월명사(月明師)와 융천사(融天師)의 작가고사(作歌故事)가 있다.
<도솔가 兜率歌>로 두 개의 태양이 나타난 괴변을 소멸시켰다든지, <혜성가 彗星歌>로 성괴(星怪)를 양제하고 침범해 온 왜병을 제 발로 돌아가게 했다든지 하는 고사는, 신라 사람들의 음악관 내지 가요관의 독특한 면을 나타낸 사례이다.
신라시대의 음악이 드러내는 이러한 예술적 신비성과 선도가 지닌 초월적 오묘성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기풍은 허황된 방술의 미망(迷妄)을 초극하여 세련된 새로운 의식의 경지를 개척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우리 겨레의 예술인에 대한 순직한 경애심을 함양하는 힘이 되었다고도 하겠다.
이 밖에 신라의 왕손이었던 대세(大世)는 신라가 좁다고 생각하여 중국의 오월(吳越) 땅으로 건너가 환골탈태하고 신선이 되는 길을 배우기 위하여, 586년(진평왕 8)에 그의 벗인 구칠(仇柒)과 함께 남해에서 배를 타고 떠나 버렸다. 이들도 선가의 인물로 꼽히고 있다.
대세·구칠이 신선을 배우기 위하여 중국을 향해 떠난 것은 이미 중국 도교를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교는 본래 신선설을 골간으로 하여 형성된 종교이므로 한국 고유의 신선사상과 습합하기가 쉬웠다. 통일신라 이후 당나라와의 내왕이 빈번해짐에 따라 중국 도교와 접촉이 깊어지면서 도교의 내단(內丹:丹學) 수련법도 도입되었다.
≪해동전도록 海東傳道錄≫ 등의 기록을 보면, 신라 말에 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記)·최치원(崔致遠), 그리고 승려 현준(玄俊)·자혜(慈惠) 등 유당학인(留唐學人)들이 중국의 수련적인 도교를 이 땅에 도입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수련도교가 우리 고유의 선풍과 혼합되면서도 선파의 맥락은 그대로 유지된 사실이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 海東異蹟≫에 나타나 있다. 그는 고려시대의 선파 인물로 이명(李茗)·곽여(郭輿)·최당(崔讜)·한유한(韓惟漢)·한식(韓湜) 등을 비롯하여 혜륵(惠勒)·아도(阿道)·흑호(黑胡)·혹산(翯山)·정호(丁皓) 등 승려까지 합하여 여럿을 꼽고 있다.
다만, 강감찬(姜邯贊) 같은 경우는 거란 토벌이라는 큰 공도 있고 하여, 문곡성(文曲星)의 현신이라느니, 호환(虎患)을 물리치는 방술을 지녔느니, 또 선도를 터득하여 대낮에 등선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나, 84세의 장수를 누린 그가 어느 정도의 선도 수련을 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지식인들이 도서(道書)를 애독하여 그 계통의 양생법과 의학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이런 계층과는 달리 몰락한 선비나 비천한 지식인들이 도술의 수련을 빙자하여 산수간을 오유하면서 시를 읊는 등 세속에서 초연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때의 낙방거사 조여적(趙汝籍)도 그런 부류의 하나인데, 그가 편술한 ≪청학집 靑鶴集≫에는 위한조(魏漢祚)를 중심으로 10여 인이 모여 지냈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선파(仙派)들은 도술도 뛰어나 수련도교를 신봉한 듯한 일면이 있으나, 환인을 동방선파의 조종으로 받들고 환웅과 단군을 높이며, 단군의 후예가 박(朴)·백(白)의 성을 쓰기도 하므로 신라의 박혁거세도 그 후예일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여 수련도교의 도맥과는 다른 위치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의 선파들은 당시 유가 계통의 지식인들과는 판이한 역사관이나 시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륙과 일본 각지를 편력하여 대국(大局)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명나라의 멸망과 만주족의 발흥을 예견하였고, 한족(漢族)에 대하여 뚜렷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가 당병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것을 통박하고, 한문화를 숭상하는 해독을 역설하였다. 그들은 당시 임진·병자의 두 큰 난리를 겪어 국력이 쇠진한 데다가 한문화에 기대어 성리의 공론에만 매달려 지도력을 상실한 상층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구세의 이념을 선도에서 찾으려고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천운이 동북에 있었으나 장차 그것이 백두산 이남으로 옮겨지면 우리 나라가 일본을 병탄하고 중국을 제압하여 천하를 평정하게 될 날이 올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세상 사람들은 공허한 글에 빠져 쇠약함에 익숙해지고, 자기의 도는 버리고 송유(宋儒)의 여타(餘唾)를 씹으며 자기의 임금을 깎아 내려 외국의 신복(臣僕)에 견주고 있다.”고 당시 지도층의 사대주의적인 패배의식을 비판하였다.
조선 후기에 실학이 대두하여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일으킨 것도 이러한 선파의 사고방식을 계승, 발전시킨 데서 얻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예로, 영·정조시대의 사학자 이종휘(李種徽)는 사대적인 패배의식을 탈피하여 자주적인 사관을 확립하려고 노력한 점에서 선파의 역사관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수산집 修山集≫ 가운데 <단군본기>·<신사지 神事志> 등에서 단군의 사적을 속설까지 수합하고 마니산 제천을 곁들여 상세하게 기술함으로써 이를 국사의 발단으로 삼아 고유 문화의 긍지를 보였고, 단군 이래의 구강(舊疆) 내지 고구려·발해의 판도 회복에 대한 의욕이 없음을 개탄하는 한편, 역대 사가들의 사대적 근성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패배의식을 배격하고 주체성을 고양하려는 선파의 사관은 한말의 사가들에게도 받아들여졌으니, 박은식·신채호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후기(기원전 403∼221)부터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 ≪초사 楚辭≫, ≪한비자 韓非子≫ 등에 불사도 불사약 연년불사 무사 등의 말이 나온다. 중국 신선설은 일반적으로 북방인 연·제(燕齊) 지방에서 나온 것으로 보나 신선설은 당시 중국의 전 지역에 퍼져 있었다.
이러한 신선설은 중국의 원초 신앙형태인 무술, 자연숭배 등 다소간 초능력적인 요소들과 혼합되어 불사약을 연조하고 죽은 혼령을 불러내고 하는 등의 방술과 그것을 행사하는 방사가 당시 중국 상하에 두루 알려졌다.
송무기(宋毋忌)·정백교(正伯僑)·충상(充尙)·선문고(羨門高) 등 방선도(方僊道)를 따르는 신선가들은 다 연 출신이었으나 제에도 방선도를 따르는 신선가들이 많았다.
한편, 신선설은 산악신앙과 관계가 깊다. 산악은 상제가 임어하는 천계와 가깝다는 관념에서 산악신앙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僊人’의 ‘僊’은 가볍게 들려 올라간다는 뜻으로, 천상을 유행함을 이르는 말이고, ‘仙人’의 ‘仙’은 ‘屳’으로도 쓰는데 산의 정상에 있는 사람으로 천계에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신선과 천상이 연결되는 것은, 죽음과 노쇠와 곤고를 부정하는, 피안사상이 희박한, 현세적인 이익의 영속을 지향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으나, 사후생활로의 전이와 연결된다.
신선은 본래부터 따로 있는, 선천적인 특이한 존재로 여겨서 그들에게는 복용하면 장생불사하는 영약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삼신산의 전설이 있다. 삼신산은 산동 연안에 연결된 발해 가운데 있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라는 3개의 산으로 된 바다섬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삼신산은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이고 불로초나 불사약이 있다고 하여 진시황은 처음에는 방사 서불(徐巿, 또는 徐福)을 시켰다가 다시 방사 노생(盧生)을 시켜 각각 다수의 수종인원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게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고 한다.
삼신산이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같이 알려진 것은 산동 연안에 나타나는 신기루를 보고 상상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물론 ≪산해경 山海經≫ 같은 선진시대의 환상적인 지리서에는 곤륜허(崑崙墟)의 신선 서왕모(西王母)와 불사약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나 가까운 발해에 있다는 삼신산이 주의를 더 끌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무제(漢武帝)도 역시 방사를 시켜 바다에 들어가 봉래산을 찾아 불로초를 구해 오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무제는 건장궁(建章宮)에다 20여 길이나 되는 높은 누대를 세워, 무위로 끝났으나, 방사들로 하여금 신선의 강림을 기축하게 하였다. 그리고 진시황과 한무제는 다 봉선(封禪)이라는 대규모의 제사를 지내 신선이 되기를 기원했다.
불사약의 수탐과 아울러 방사들은 불사약인 선단의 연조를 계속 시도하였다. 선단의 연조방법은 후한 때 좌자(左慈)로부터 갈현(葛玄)과 정은(鄭隱)을 거쳐 진(晉)의 갈홍(葛洪)에게까지 전승되었다.
또 후한 때 오지방 사람 위백양(魏伯陽)은 선단을 연조하여 그 선단을 먹고 진인(眞人)이 되어 제자와 애견과 함께 선계에 올라갔고, 그 방법을 기술한 ≪주역참동계 周易參同契≫는 도교경전의 하나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당나라 때도, 실효는 거두지 못했으나 도사들에 의해 선단이 연조되기는 하였다.
유하(流霞)는 신선술로, 한 잔만 마셔도 기갈이 없어진다고 한다. 항만도(項曼都)는 신선을 만나 유하 한 잔을 얻어 마시고는 기갈을 느끼지 않고 10년 만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전했다.
천주(天酒)라고도 하는 감로(甘露)는 하늘에서 내리는 맛이 단 이슬로, 마시면 하고 싶은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감로를 받으려고 금속 선인장을 설치하였다.
선도(仙桃)는 곤륜허에 수천 리를 덮고 도사려 있는 복숭아나무에서 3천 년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다는, 반도(蟠桃)라고도 하는 복숭아로, 7월 7일이면 서왕모가 선도를 따다가 잔치를 베푸는데 주목왕(周穆王)이 그 잔치에 나가 선도 4개를 먹었다고 한다. 한무제의 방사 이소군(李少君)은 선인 안기생(安期生)이 선과(仙果)인 참외만한 대추를 먹더라고 했다.
불사약을 먹고 불로장생을 기도하는 것은 외물에 의한 방법이다. 외물의 힘이 아닌, 수행을 통해 불로장생을 얻는 방도가 강구되었다. 노자의 ≪도덕경≫ 제59장의 장생구시지도(長生久視之道)는 낭비하지 않는 뜻인 색(嗇)의 수행으로 불로장생을 얻는 방법이다.
기력이나 정력을 낭비하지 않는다면 왕성한 활기를 쉽게 되찾는다는 것으로, 뿌리를 깊이 밖고 열매꼭지를 단단하게 하여 무한한 저력을 가꾸어 불로장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장자≫ <재유>편의, 광성자(廣成子)가 황제에게 장생의 지극한 도리를 일러주었는데, 그것은 수일처화(守一處和)로, 한결같은 자연의 도를 지켜 만사에 조화롭게 대처한다는 것이다.
광성자는, “1천2백 년 동안 몸을 닦았는데도 내 몸은 전연 노쇠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수행을 통해 불로장생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고는 자력을 통한 추구여서 진일보한 측면을 보여준다. 죽지 않고 건강하게, 끝없이 오래 산다는 일은 실현하기 어렵고 불가능하다. 그러나 장생불사에 대한 욕구는 단념하기 어렵다.
신선가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하고 무병장수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려고 했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 약칭:漢志)≫의 마지막 <방기략 方技略>에는 신선가에 앞서 의경(醫經)·경방(經方)·방중(房中)이라는 3가지 방기가 나온다.
의경은 의학의 이론이고, 경방은 대증을 치료하는 방법이고, 방중은 성생활을 조절하는 방법인데, 다 무병장수를 이룩하는 방편이다. 신선가도 방기인데, 앞의 의경 등 3가지까지 포괄할 수 있다.
≪한지≫의 신선가에 대한 해설은, “신선이란 생명의 진실을 보존하고서 그 밖의 여기저기서 무엇인가를 찾는 방법이다. 잠시 그것으로 생각과 마음을 가라앉혀 죽음과 삶의 경지를 같게 하여서 가슴속에서 두려움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주안점은 생명의 진실을 보존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 버리는 데 있다.
≪한지≫ 신선가의 책이름에는 ≪황제잡자보인 黃帝雜子步引≫·≪황제잡자지균 黃帝雜子芝菌≫·≪신농잡자기도 神農雜子技道≫·≪태일잡자황야 泰壹雜子黃冶≫ 등이 나온다.
‘步引’은 ‘步捨游引’의 준말로 혼백이 육신에서 걸어 나가 천상 선계를 유행하다가 시신 등 남겨 두었던 것을 끌어가서 신선이 된다는 시해(尸解)와 유사한 방법이다. 기도는 글자 그대로 기예의 방법이다. 황야는 단사를 황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이다.
≪한서≫ <교사지 郊祀志>에 따르면, 제지방 출신들인 이소옹(李少翁)·공손경(公孫卿)·난대(欒大) 등은 다 한무제의 방사로 황야를 향했다. 갈홍은 선단 연조의 재료를 준비할 재력이 없어서 연조에 손을 대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불로장생이나 무병장수에도 재력이 필요하므로 황야의 방술도 필요했던 것이다.
이 밖에 또 ≪황제기백안마 黃帝岐伯按摩≫가 있는데 안마는 몸을 누르고 문지르고 하여 적절한 자극을 주어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 주는 기예이다. 남이 해주는 안마와는 달리 자신이 하는 운동으로는 도인(導引)이 있는데, 몸을 여러 가지로 굽혀 가며 호흡을 하는 도수체조 같은 것이다.
신선가들이 행하던 주요한 기예 중에는 또 태식(胎息)과 벽곡(辟穀)이 있다.
태식은 태아가 모태 안에서 탯줄을 통해 배로 숨쉬는 것같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것을 뱃속에 가두어 오래 참아내는 폐기법(閉氣法)으로, 건강에만 좋을 뿐 아니라 잘하면 불로장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벽곡은 곡식을 먹지 않고 음수 식기(食氣)를 위주로 하고 백출(白朮)·산약(山藥:마)·황정(黃精)·거승(巨勝:흑임자)·복령(茯苓)·영지(靈芝) 등의 보조약품을 복용한다.
≪황제잡자지균≫의 지균은 몸에 좋은 버섯을 가려서 먹는 방법으로, 고래로 영지 자지(紫芝) 같은 것을 먹으면 불로장생을 가능케 한다는 버섯이 있다. 이 밖에 두꺼비·박쥐·거북·제비 같은 동물 가운데서도 가려서 먹으면 장수하게 된다 하여 그런 것을 육지(肉芝)라고 부른다. 도교 성립 후에도 이러한 방기가 받아들여졌다.
신선이 된다는 것은 황당하기는 하나, 인간은 크게는 불로장생을 작게는 무병장수를 바라는 생각을 지워 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선 이야기에 관심을 모아 왔다. 서왕모는 천상에서 금령(金靈)의 기를 주관하고 서방을 다스리는 천선으로, 황제에게 병부(兵符)와 도책(圖策)을 주어 치우(蚩尤)를 이기게 해 주었고, 신궁(神弓)인 예(羿)에게 준 불사약을 그의 처 항아(姮娥)가 훔쳐먹고 달로 달아났다는 등등의 설화가 전해진다.
황제는 도인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끝에 득도하여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어 형산(荊山)에서 보정(寶鼎)을 만든 다음, 거기에다 선단을 연조하여 그것을 먹고 신선이 되어, 선계에서 정호(鼎湖) 가로 내려보낸 용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올라타고 선계로 올라갔다.
노자는 ≪사기≫ 본전에 따르면 춘추 말기 주실(周室)의 주하사(柱下史, 국립도서관장 격)로 있다가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주실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을 나가 서쪽 땅으로 가 버렸다. 신선가들은 노자를 태초부터의 신선이라 하고 노자 ≪도덕경≫ 81장에 준하여 노자의 변화를 말하기까지 하였다.
노자호화설(老子胡化說)은, 노자가 인도에 가서 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노자는 선계의 높은 지위에 있던 신선으로 살고 있었다. 황제와 노자는 신선가들 사이에서 황로사상을 조성하게 하였다.
신선들을 다룬 유향(劉向)의 ≪열선전 列仙傳≫, 간보(干寶)의 ≪수신기 搜神記≫, 갈홍의 ≪신선전≫, 심분(沈汾)의 ≪속선전≫ 등이 나왔고, ≪도장≫의 ≪역세진선체도통감 歷世眞仙體道通鑑≫과 장군방(張君房)의 ≪운급칠첨 雲笈七籤≫에도 선화가 많이 들어 있다.